[광화문 칼럼] 반복되는 ‘일본-대만 동맹’의 삼성 따돌리기

정상혁 기자 ㅣ digihyuk@chosun.com
등록 2023.02.09 09:59

디지틀조선일보 정상혁 방송본부장

“우리와 샤프가 손 잡으면 삼성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함께 싸웁시다.”

2012년 3월 26일 궈타이밍(郭台銘) 대만 홍하이 그룹(아이폰 제조사 폭스콘 모회사) 회장은 투자협상을 위해 일본 샤프 10세대 LCD 공장을 찾은 자리에서 삼성 타도를 외쳤다. 당시 과도한 설비 투자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자금난에 허덕이던 샤프에게 궈 회장은 흑기사였다. 마치다 가스히코(町田勝彦) 샤프 회장은 에도시대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 함대 사령관 이름 ‘매슈 캘브레이드 페리’를 궈 회장 영문이름 ‘테리’에 빗대 “페리 대신 테리가 왔다”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샤프의 기술력과 홍하이의 저렴한 노동력이라는 양쪽 니즈(needs)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양사는 이날 홍하이가 샤프 본사 지분 9.9%를 매수하고 궈 회장 개인이 사카이(堺) 공장 지분 46.5%를 인수하는 안에 합의했다.

2016년 3월 샤프 지분 66%를 소유하며 1대 주주가 된 홍하이 그룹은 같은 해 12월 예고도 없이 삼성을 향해 디스플레이 공급 중단을 선언했다. 삼성에 타격을 입히려는 의도적 조치였고 갑작스럽게 허를 찔린 삼성 내부에선 “궈 회장이 기본 상도의조차 무시했다”는 격앙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한국 LCD TV 패널 세계 시장 점유율은 4.6%로 지난해 10.6%에서 대폭 낮아질 전망이다. 반면 대만은 19.3%로 1위 중국(65.5%)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일본은 5.7%로 한국을 제치고 3위에 오를 것으로 예측됐다.

삼성 따돌리기 ‘일본-대만 동맹’ 역사는 최근 반도체 산업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대만 TSMC는 현재 일본 구마모토현에 약 1조1000억 엔(약 11조 원)을 들여 공장을 짓고 있다. 일본 정부의 지원은 파격적이다. 경제산업성은 약 4760억 엔(4조5000억 원), 구마모토현은 약 50억 엔(477억 원)을 지원하고 토지 및 건물에 대한 세금도 감면해 줬다. 한때 세계 최대 반도체 국가였던 일본이 대만 TSMC와 합작을 계기로 본격적인 권토중래에 나선 것이다. 일본은 반도체 제조분야에서만 뒤처졌지 소재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55%로 세계 1위, 장비는 35%로 미국(40%)에 이은 2위다. 이들 소재·장비 회사들이 TSMC를 우선해 기술개발에 나서면 삼성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세계 반도체 산업은 메모리가 아닌 파운드리 중심 생태계로 재편되고 있다. 또한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연합 간 경쟁 구도로 변하고 있다. 사실상 최근 ‘미국 설계, 일본 소재, 대만 생산’으로 조성되고 있는 생태계 속에서 메모리 강자 삼성은 소외되고 있는 느낌이다. 전문가들은 삼성도 일본 반도체 회사들과 긴밀한 공조를 통해 ‘일본-대만 동맹’을 극복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최근 미중 반도체 전쟁으로 일본의 많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중국이라는 큰 시장을 잃었다. 이 기회를 활용해 그들의 한국 진출을 유도하면 국내에도 탄탄한 생태계 구축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소부장 국산화도 필요하지만 스피드가 생명인 반도체 시장에서 빠른 기술 혁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통해 한국 업체와 합작하는 일본 기업들이 늘어나면 소부장 국산화도 앞당길 수 있다.

최근 TSMC가 일본에 두번째 공장 설립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대만과 일본의 밀월관계가 한층 강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해 9월 한국, 미국, 일본, 대만으로 구성된 '미-동아시아 반도체 공급망 회복력 작업반(칩4)' 예비회의가 개최됐다. 그러나 그 뒤로 서로의 득실을 따지는 수싸움은 한층 가열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일본, 대만은 정부가 앞장 서서 연합을 주도하고 있는 반면 한국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며 “반도체 주도권 경쟁이 국가 대리전 양상을 띄고 있는 만큼 국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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