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공약 가계부']

① 세출 절감으로 84兆?
SOC·산업·농림 예산 2년새 4조9000억 늘어

② 비과세·감면으로 18兆?
작년 7개 폐지, 6개 신설… 지금까지 4000억만 확보

③ 지하경제 양성화로 27兆?
5만원권 환수율 29.7%… 오히려 지하경제 키울 수도

박근혜 정부의 공약 가계부는 '증세 없는 복지'를 상징한다. 기획재정부는 2013년 5월 공약 가계부를 발표할 당시 "역대 정부 최초로 국민에게 공약 가계부를 제시하는 것"이라며 "국민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신뢰 있는 정부를 실현하는 토대이자 우리나라 세입·세출 시스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발표 후 1년 반이 흐른 현재 공약 가계부는 곳곳에서 구멍이 나고 있다. 정부는 공약 가계부를 통해 비과세·감면 정비(18조원), 지하경제 양성화(27조원), 세출 절감(84조원) 등 크게 세 가지 재원 조달 방안을 마련했지만, 지금까지 진도율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세액공제 축소, 담뱃값·주민세·자동차세 인상 등으로 '꼼수 증세' 비난을 받으면서도 곳곳에서 세금을 늘리는 배경에는, 공약 가계부는 구멍이 나고 있는데 공식적으로 증세(增稅)는 할 수 없는 모순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절감하겠다던 세출 오히려 증가

공약 가계부에서 정부는 5년간 세출을 84조1000억원 줄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공약 가계부를 현시점에서 열어보면 세출은 오히려 늘었다. 정부는 공약 가계부 이행 실태를 전면적으로 공개하지는 않고 있다. 현재 검증이 가능한 분야는 SOC·산업·농림 예산 등 세 곳이다. 이 세 분야의 5년간 절감 목표액은 21조1000억원이고, 작년과 올해 중 8조7000억원을 줄이도록 돼 있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세 분야에서 세출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4조9000억원이 늘었다.

세출 조정이 어려운 것은 경기 침체와 이해관계자들의 저항 때문이다. 경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관련 산업의 침체를 배가할 수 있는 예산 절감을 실행하긴 어려운 것이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앞으로 경기가 계속 안 좋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세출 절감은 무척 고통스럽다"며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말했다.

◇세밀하지 못한 비과세·감면 정비

정부는 또 공약 가계부에서 5년간 각종 비과세·감면 항목을 정비해 18조원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깎아주던 세금을 18조원 더 거둬서 공약 실현 재원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6조7000억원을 올해까지 거둬들이겠다는 계획이다. 이번 연말정산에서 난리가 난 세액공제 축소도 바로 이 틀 안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보한 재원은 4000억원에 불과하다. 비과세 및 감면 축소를 통해 조달하려고 했던 재원의 불과 6%를 확보하는 데 그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말정산 비난 여론에 밀려, 당정이 후퇴하는 바람에 올해 국세 감면액은 작년보다 1000억원 이상 훌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재원이 더 줄어드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비과세·감면 정비는 한번 해놓으면 효과가 해당 연도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며 "지금까지 실시한 비과세·감면 정비의 장기적인 효과는 10조원이 넘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는 비과세·감면 조항을 없애는 한편으로 정치권 요구 등으로 다른 비과세·감면 조항을 계속 새로 만들고 있다. 실제 작년 세법 개정 때 비과세·감면 조항 7개가 폐지됐지만 6개가 신설됐다. 그러면서 비과세·감면 정비를 통한 재원 조달은 4000억원에 그쳤고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검증 불가능한 지하경제 양성화

공약 가계부에는 5년간 27조원의 지하경제 양성화 재원도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국세청과 관세청이 합쳐서 2013년에 3조원 이상 '노력 세수(세무조사 등을 통해 추가로 거둔 세금)'를 늘려서 2013년 목표인 2조7000억원을 초과 달성했다고 주장한다. 또 이런 기조가 계속 이어지면 5년간 27조원을 무난하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매년 해오던 세무조사를 강화해 노력 세수가 늘었다고 해서 이를 지하경제 양성화 재원으로 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세무조사는 지하경제를 오히려 키워 세수를 줄였을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5만원권 환수율은 29.7%에 그쳤다.

현재 정부는 공약 가계부 준수에만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니다. 세수가 애초 예상보다 2013년 8조5000억원, 지난해 11조1000억원이 덜 걷혔다. 수입이 계획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방법은 두 가지다. 이번 연말정산이나 담뱃값 인상처럼 꼼수 증세를 하거나, 빚을 져 국가 채무를 키우는 것이다.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는 "복지 제도 등을 손봐서 지출을 줄이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와 있다"며 "현실을 인정하고 지출 계획의 기본 얼개부터 다시 짜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