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본무언(義本無言)의 추억>

                               임이석 (임이석테마피부과 원장)

1986년 대한민국 극장가를 휩쓴 영화가 바로 ‘영웅본색’이다. 끈끈한 의리, 멋진 액션, 주연배우 주윤발의 터프한 연기로 이루어진 환상의 삼박자는 너도 나도 극장으로 모으기에 충분했고, 그 사람들 중에 나도 있었다.
영화를 보고 너무나 큰 감동을 느낀 나는 바로 그 자리를 뜨지 못했고, 선 채로 다음 편 영화를 다시 한번 보고 나올 정도로 순식간에 빠져들고 말았다.

영웅본색이 우리 세대의 남자들에게 그렇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윤발이라는 배우의 신선한 카리스마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그 이후 나는 식사를 하고 이쑤시개 대신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고 다녔고, 때 아닌 바바리 코트를 사고 싶어 옷 가게를 어슬렁거릴 정도였으니, 영화 한편이 나에게 주었던 영향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이후부터 주윤발이라는 배우가 나오는 모든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런 현상을 영화 수입사에서 놓칠 리 없을 터. 주윤발이 단역으로 스치는 영화도 마치 주연처럼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나같이 순진한 학생들의 쌈지 돈을 챙겨가기 일쑤였다.

그때 내가 ‘주윤발 주연’이라는 문구에 속아 본 영화 중의 하나가 ‘의본무언(義本無言)’이다. 주윤발의 액션을 기대했지만 2시간짜리 영화 중 주윤발이 나온 시간은 십 여분 남짓. 그것도 주인공의 친척으로 잠깐 나온 것이 전부였다.
아 이렇게 사기를 당하다니.. 그래서 나는 이 영화제목을 절대 잊지 못한다.

그리고 어느덧 25년이 지났다. 나는 아직도 이 영화제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의본무언 : 의리는 본디 말이 없다]는 뜻이다. 영웅본색이니 첩혈쌍웅이니 당시 사자성어 같은 네 글자 제목이 유행이라 수입배급사에서 급조하여 지은 제목이겠지만,
세상을 살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고 더불어 살아가면서 새록새록 더 또렷해지는 게 바로 이 영화제목 [의본무언]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말로만 의리를 외치고, 자기가 잘났다고 떠버리는 세상 속에서 ‘믿을 건 내 자신밖에 없다’ 외치며 살아간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진정한 의리는 말이 없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놓치고, 눈앞에서 보이는 것에 급급하고, 거창하고 화려한 관계에 엮였을 때 결과적으로 낭패를 당하거나 손해를 봐왔던 것 같다.
그리고 혹시 다른 이들에게도 내가 그렇게 말로만 의리를 외치는 사람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말로만 떠드는 의리는 진짜가 아니다.

요즘 들어 25년 전 사기(?) 당하며 봤던 영화 ‘의본무언’ 자주 떠올리게 된다.
특히 바쁘고 정신 없을 때일수록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머리 속에서 한번 더 되뇐다. “의리는 본디 말이 없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