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남은 것들의 비밀>, 샘터

'VMD 1호 박사' 이랑주 씨가 발로 뛰며 쓴 세계 시장 생존 보고서

(김지현 기자 = bombom@chosun.com) 옷을 세련되게 입는 사람에게 ‘스타일이 좋다’고 말한다. 각각의 옷과 액세서리, 가방을 아름답게 조화한 경우다. 물건을 파는 가게에도 스타일이 있다. 다양한 색상과 모양의 물건이 조화롭게 진열되어 있을 때 가게의 이미지와 품격이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고객의 시선을 잡고 판매를 촉진하는 상품 진열 디자인을 VMD(Visual Merchandise Design)라고 한다. 주로 백화점에서 활용되는 VMD를 전통 시장에 도입한 전문가가 있다. 국내 VMD 1호 박사인 이랑주 씨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의 전통시장을 다니며 수많은 상인들을 만나고 여러 점포를 찾았다. 진열 교육도 하고 컨설팅도 해 줬다. 그의 컨설팅 덕분에 많은 쪽박 가게들이 대박 가게로 거듭났고, 그에게는 ‘미다스의 손’, ‘길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그녀를 괴롭히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다 망해 가는 지하상가에 강연을 갔을 때였다. 강의 중에 자신이 처음 몸담았던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1980년 이대 앞 보세옷 가게로 시작해 오늘날 대기업이 되기까지의 경영 전략과 남다른 VMD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나도 그때 옷 가게 시작했는데, 나는 왜 다 망해 가는 상가에 있는 걸까요?”
순간 그녀는 말문이 막혔고 “열심히 하시면 잘될 거예요”라는 상투적인 대답을 하고 말았다. 강연장을 나와서도 이 질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시장에서 만난 상인과 소상공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가게 한편에서 쪽잠을 자며 하루 14시간씩 일하는데도, 하루에도 수백 개의 점포가 문을 닫는 것이 현실이다.

이 씨는 그 답을 찾기 위해 2012년 3월부터 1년 동안 세계 일주를 떠났다. 40여 개 나라 150여 곳의 시장을 방문했고, 오랜 시간 고객에게 사랑받고 있는 여러 시장과 상인들을 만났다. 두 발로 뛰어다니며 경험한 사례들과 장사 철학을 한 권의 책 (살아남은 것들의 비밀, 도서출판 샘터)에 담았다.

흔들리는 ‘진통’이 흔들리지 않는 ‘전통’을 낳는다
 
전국에 1천5백여 개의 전통시장이 있지만 생존할 수 있는 시장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대형 마트의 매출이 매년 30퍼센트씩 성장할 때 전통시장은 7퍼센트씩 감소하며, 전통시장과 중소 유통업체 상인들의 폐업률은 매년 15퍼센트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랑주 씨가 만난 세계의 전통시장과 소상공인들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말에 열거나 요일을 정해 여는 시장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경제 위기에도 살아남은 상인들은 자신만의 확고한 장사 철학을 갖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형 마트에선 구할 수 없는 우리만의 특별함을 팝니다.”
그들로부터 배운 것은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각도’라는 사실이었다. 나의 가치를 올리고 오랫동안 살아남는 방법은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나만의 각도를 갖는 것이라고 이 씨는 말한다. 그리고 수많은 변화의 물결에 흔들리면서도 자신만의 각도로 살아남아 ‘시장의 전통’이 된 그들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365일 축제가 열리는 시장, 엄마가 가족에게 주고 싶은 것만 파는 슈퍼마켓, 평범한 피클에 표정을 담아 ‘명품 피클’을 만든 가게, 책과 함께 간장을 파는 서점, 지붕이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시장 등 늙음을 낡음이 아니라 성숙한 창조로 탈바꿈시키고, 눈으로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독특한 경험을 선사해 주며, 독특한 진열과 독창적인 홍보 전략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  시장과 가게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대박 매출을 기록할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건을 파는 나의 관점이 아닌 나의 물건을 선택하는 고객의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저 익숙한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말고 다른 형태는 없을까?’ 다르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흔들리는 ‘진통’이 흔들리지 않는 ‘전통’을 낳는다. 지금 당신이 팔고 있는 물건은 무엇인가? 단순 판매 기능만을 가진 대체 가능한 시장이 될 것인가? 스토리와 재미, 경험을 공유하는 대체 불가능한 시장이 될 것인가?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