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업소 매출 반토막 “이렇게 어렵기는 처음”

일본 도쿄에서 시부야, 이케부쿠로와 함께 3대 ‘부도심(副都心)’으로 꼽히는 신주쿠(新宿). 하루 유동인구 400만을 자랑하는 번화가 신주쿠역에서 10여분만 걸으면 도쿄 최대 한인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가 나온다.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재일 한국인이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이 신오쿠보는 2003년 드라마 ‘겨울연가’ 등으로 대표되는 ‘한류(韓流) 열풍’을 타고 급속히 성장했다. 거리 곳곳에는 한류 스타들의 사진과 캐릭터 상품을 취급하는 한류 전문 매장, 삼겹살 등 한국 요리를 파는 식당, 한국 화장품 가게들이 앞다퉈 들어섰다. 과거 ‘한국인 밀집 지역’ 정도로 분류되던 신오쿠보는 2000년대 후반 일본 지방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에도 포함되는 등 일본인들에게 ‘한국 문화 체험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주일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현재 신오쿠보 내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업소는 식당 100여곳, 술집 20여곳 등 모두 400여곳에 이른다. 늘어나는 가게로 상권도 팽창해갔다. 한류 초기 한인타운의 중심지 역할을 한 ‘쇼쿠안 거리’, 한식당·마트 등이 밀집한 ‘오쿠보 거리’, 화장품·옷 가게 등이 들어선 ‘이케멘 거리’는 신오쿠보를 상징하는 주요 상권이 됐다.

특히 일본 경제 불황과 3·11 동일본대지진 여파 속에 2011년 도쿄 내에서 공시지가가 오른 지역은 세계 최고 높이 전파탑 ‘스카이트리’가 들어선 스미다(墨田)구와 신오쿠보, 단 두 곳뿐이었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거침없는 성장을 거듭해온 이곳 신오쿠보 상권에 지난해부터 심상치 않은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왜일까. 지난 10월 1일 오후 6시쯤 JR신오쿠보역을 기점으로 1㎞ 이상 길게 이어진 이른바 ‘오쿠보 거리’는 한산한 모습이었다. 저녁시간인데도 행인은 눈으로 금방 셀 정도로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대부분 무심히 한국 가게들을 지나쳐갔다. 손님을 모으려 가게 앞으로 나온 아르바이트생들의 외침도 소용이 없었다.

이케멘 거리 등 좁은 골목 상권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10여개 테이블에 손님이 단 한 명도 없는 음식점도 군데군데 보였다. 한류에 관심이 많은 일본 여고생이나 주부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밥을 먹고, 일부 음식점에선 줄까지 서던 예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오쿠보 거리의 한국 음식점에서 2년째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모(30)씨는 “작년 상반기와 비교하면 월 매출이 반토막 났다”고 말했다. 재일한국인연합회 소속 업주들은 “신오쿠보에서 장사하면서 요즘처럼 어렵긴 처음”이라며 “이곳 상권에 위기가 닥친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신오쿠보 업주들은 위기의 시발점을 작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지난해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왕의 사과를 요구한 직후다. 일본 내 반한 감정에 불을 지핀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신오쿠보의 한 자영업자는 “신오쿠보 사람들도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엔 백번 동의하지만, 독도 문제가 불거진 시점도 아니었던 데다 대통령이 굳이 일왕까지 언급해야 했나 하고 원망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우려대로 이후 일본 극우단체의 혐한(嫌韓) 시위가 본격화됐다.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 등은 일요일마다 신오쿠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서만 이미 열 두 차례다.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든 채 신오쿠보 일대를 행진하며 “도둑 국가 한국” “다케시마(독도)를 내놓으라” “조센진 죽어라” 등의 구호를 외쳐댔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류 전문 매장 앞에서 손님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욕설을 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한 점주는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 익숙지 않은 일본 젊은층들은 일단 시위를 접한 뒤 한 번 놀라고, 이후 (신오쿠보에) 발길을 끊는 경우도 있다”며 “대놓고 한류를 즐길 수 없는 분위기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극우단체 시위는 신오쿠보 상권에 직접적인 타격을 줬을 뿐 아니라, 일본 내 반한 감정을 상징하는 결정적 징후였다. 이들은 2020년 하계올림픽 개최지 발표를 앞두고 지난 6월부터 약 두 달간 시위를 중단했다가 도쿄의 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지난 9월 8일 혐한 시위를 재개했다.

2003년 배우 배용준을 시작으로 보아, 동방신기, 장근석으로까지 이어진 한류의 열기도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 2010년 한류를 대표하던 동방신기의 해체 등이 영향을 미쳤지만, 일본 내 반한 감정 격화로 더욱 가속화됐다.

한류 스타들의 입지도 예전만 못하다. 2011년 동방신기, 소녀시대, 카라가 출연했던 일본 최대 연말 가요대전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에 지난해에는 한국 가수가 단 한 팀도 출연하지 못했다. 한국 가수가 일본에서 음반을 냈을 때 성공 기준이 되는 ‘2만장 판매고’를 올리는 경우도 드물어졌다.

드라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본의 올 1∼4월 한류 드라마 판매·대여 금액은 지난해에 비해 20％ 가까이 줄었다. 최근 NHK 등 주요 방송사들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해를 품은 달’ ‘시크릿 가든’ 등을 방영했지만, 시청률이 한 자릿수에 머무르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한국 드라마 판권을 사들여 방영하기는 하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신오쿠보 상권의 주력 상품은 대부분 한류 붐에 의존하는 파생 상품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류 열기가 식으면 상권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미 레드오션이 된 신오쿠보 상권 내에서 가게들의 중복된 업종(業種)·업태(業態)도 마이너스 요인이다. 신오쿠보 내 한인이 운영하는 삼겹살 가게, 치킨 가게는 수십 개에 달한다. 대부분 식당이나 주점으로 창업하는데, 차별화된 전략이나 메뉴 없이 이른바 ‘잘되는 가게’와 비슷한 상호로 우후죽순 가게를 내면서 팽창해왔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오쿠보의 한 업주는 “우리 중에는 과거 일본에서의 성공 사례를 보고 건너온 영세 업주가 많아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특정 업종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수요는 계속 떨어지는데 공급이 늘어나 불균형이 발생하는 ‘과잉 공급’ 상태가 빚어지면서 가게 문을 닫거나 뒤늦게 업종을 바꾸는 가게들도 속출했다. 한국 가게가 또 다른 한국 가게로 바뀌기도 하고, 두세 달 만에 가게 주인만 바뀌는 경우도 많다. 사업이 힘들어지자 아르바이트생들의 수당을 제대로 못 챙겨주고, 심지어 가게 문을 닫으면서 권리금만 챙겨 잠적하는 업주도 생겨났다. 은행 빚을 갚지 못하는 신오쿠보 한인 업주가 늘면서 은행은 이들에 대한 대출 심사를 엄격하게 하기 시작했다.

신오쿠보 업주들은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만큼 한국 뉴스를 열심히 본다. 한국발(發) 보도가 한·일 양국 관계를 가장 잘 반영하는 만큼 이들의 생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 상인은 “작년 말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매일 한국 뉴스를 보면서 ‘오늘은 또 어떤 뉴스가 나올까’ 걱정할 정도”라고 했다.

이처럼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그래도 신오쿠보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질 거라는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다. 극적이진 않지만, 한·일 관계 개선의 징후들이 곳곳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9월 22일 신주쿠 거리 한가운데서 일본 극우단체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평화 행진인 ‘도쿄대행진’이 열렸다. 1963년 흑인 인권운동의 시발점이 된 워싱턴 평화대행진을 본뜬 행사로, 일본 내 인종차별 반대 시민단체(People’s Front of Anti-Racism) 주도하에 10대 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 1000여명의 도쿄 시민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신주쿠구 중앙공원에서 신오쿠보에 이르는 이 일대 3㎞ 도로를 행진하며 “No Racism(차별 반대)” “Stop hate(증오를 멈추라)” “친하게 지내요”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극우단체가 혐한 시위 등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평화 행진도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전날인 9월 21일에는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양국 간 최대 민간 교류 행사인 ‘한·일축제 한마당 2013 인 도쿄’ 개회식이 열렸다. 매년 열리는 행사지만 올해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부인인 아베 아키에(安倍昭惠·51) 여사가 직접 참석했다. 이 축제에 현직 일본 총리 부인이 참석한 것은 2009년 첫 행사 당시 하토야마 총리의 부인 미유키 여사 이후 두 번째였다. 이날은 아키에 여사 외에도 왕족 다카마도노미야(高圓宮) 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 등 일본 내 요인(要人)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에 갈등 국면으로 치닫는 한·일 관계에 일본 정부가 개선 의지를 보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 행사에는 주최측 추산 총 4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K팝 콘테스트, 한·일 전통 예술 공연 등을 관람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도쿄지사 등의 부스에도 도쿄 시민들의 발걸음이 줄을 이었다. 한류 부활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재일한국식음업협회 이의형 회장은 “도쿄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일본인들 사이에서 극우주의자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 여론이 더욱 거세진 것이 사실”이라며 “아직 올림픽까지는 7년이나 남았지만, 올림픽 유치에 따른 양국 관계의 긍정적인 신호들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여전히 일본과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정부와 달리 주일 한국대사관 측은 ‘한류의 성지’로 불리는 신오쿠보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병기 주일 한국대사는 지난 6월 취임 이후 신오쿠보를 찾아 교민들과 함께 골목 구석구석을 청소하며 지역 현황 파악에 나서기도 했다.

신오쿠보는 본격적인 한류 바람이 불기 전에 이미 한·일 양국의 특별한 인연이 서린 곳이다. 지난 2001년 전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고(故) 이수현씨가 생을 마감한 곳이 바로 신오쿠보역이다. 아직도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회사원 오하나 아키오(49)씨는 “의인 이수현씨가 보여준 것처럼 신오쿠보가 한·일 양 국민의 우호를 다지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일본에게) 한국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이웃인 것처럼 한류도 이제 일본인들의 생활이 됐고 문화가 됐습니다. 예전처럼 다시 신오쿠보가 활기를 되찾고, 양국 젊은이들이 서로 마주보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 더 많은 기사는 2013년 10월 7일 발매할 주간조선 2276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