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복지 예산 투입시기 뒤로 미룬 꼼수… 국민 소득수준 맞춰 재조정을"]

기초연금·중증질환 健保 등 국민 다수에게 주는 복지혜택, 2016·2017년에 집중되는 구조
2017년 고교 무상교육은 대기업이 부담하는 부분까지 국가가 스스로 떠안는 셈

더 늦기 전에 복지 공약을 수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불씨는 8일 정부가 발표한 세제 개편안이 댕겼다. 증세 없이 공약을 지키겠다던 정부가 월급쟁이들에게 손을 벌리자 여론의 거센 비판이 일었고, 결국 대통령이 나서 세법 수정안을 마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재정 전문가들은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리한 복지 공약을 포기하지 않는 청와대의 고집에 있다고 지적한다. 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현재 상태는 재원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순차적으로 해야 할 복지 정책을 한꺼번에 다 펼쳐놓은 상태"라며 "이래서는 재정이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민 모두에게 혜택 주려는 복지, 재정 부담 눈덩이

5월 말 정부가 발표한 공약 가계부에 따르면, 5년간 복지 공약을 실천하는 데만 79조3000억원이 필요하다. 5조2000억원이 필요한 반값 등록금 사업까지 합하면 소요 재원이 84조5000억원에 이른다. 그런데 현 정부가 하겠다는 공약은 대상자 대다수가 혜택을 받게 하는 보편적 복지 방식이 많다. 그런데 이런 보편적 복지는 필요한 재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약점이 있다.

기초연금이 대표적인 예다. 보건복지부가 만든 국민행복연금위원회는 기초연금 추진 방안과 관련 '소득 하위 70% 노인을 대상으로 소득 인정액에 따라 20만원 이내에서 차등 지급'하는 방안을 제1안으로 제시했는데, 이렇게 하면 2017년까지 매년 8조5500억원이 들어간다. 이후 2020년 14조5000억원, 2040년 88조6000억원, 2060년 212조7000억원으로 부담이 급격히 늘어난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소득 하위 80% 노인에게 20만원씩 정액 지급'안을 실천할 경우, 2017년까지 연평균 12조1750억원, 2040년이면 연간 예산 부담액이 129조원을 넘는다.

사정은 4대 중증 질환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도 비슷한데, 정부는 4대 중증 질환 보장에 올해 3000억원 들지만 이 돈이 2015년에는 1조8000억원으로 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밖에 5년간 정부 부담액이 많은 복지 공약 중에 셋째 아이 이상 대학 등록금 전액 지원(1조2000억원), 0~5세 보육료·양육수당을 전 계층에 지원(5조3000억원), 3~5세 누리과정 지원 단가를 단계적으로 인상(6조5000억원)하는 것 등이 모두 보편적 복지 방식이다. 배국환 전 기획재정부 차관은 "복지 사업은 종류와 무관하게 한번 시작하면 철회가 불가능하다"며 "당연히 단계적으로 국민 소득수준에 맞춰 가야지 한 번에 다수에게 혜택을 주려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공약 이행을 위한 재정 부담은 2016년과 2017년에 집중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때 가서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대규모 재정 적자가 불가피한 셈이다. 우리나라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줄곧 10조원 이상 재정 적자를 보고 있다. 정부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복지 공약 부담을 감추기 위해 복지 공약 실행 시기를 뒤로 미뤄 놓는 '꼼수'를 썼고, 이대로 가면 차기 정부는 현 정부보다 훨씬 더 큰 '복지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증세 없는 복지란 '저부담저복지'인 우리나라의 복지 정책을 '저부담고복지'로 한 번에 점프시키겠다는 말인데, 결국 재정에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잘못된 복지 설계, 경제 효율 떨어뜨린다

복지 공약의 문제는 돈만이 아니다. 일부 공약은 사회적 자원 배분을 왜곡하고, 경제 전반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고교 무상교육, 대학 반값 등록금 정책이 그런 예다.

새누리당과 교육부, 청와대는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내년 도서 벽지 지역 고교부터 무상교육을 시작해 2017년에는 전 지역과 전 학년 고교생에 대해 전면 무상교육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무상교육이 전면 시행되는 2017년 대상 고교생은 165만명, 들어갈 예산은 2조1500억이다. 그런데 고교생 전체에 대한 무상교육은 기업이 직원들에게 지원해주는 고교생 학비를 정부가 대신 떠안는 결과를 낳는다. 학비를 부담하기 어려운 가정뿐만이 아니라, 삼성·현대 같은 대기업 직원 자녀까지도 무상교육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현재 30대 그룹의 주요 계열사는 거의 100% 고교생 자녀의 등록금을 전액 보조하고 있다.

5년간 5조2000억원이 들어가는 반값 등록금 사업은 정부가 부실한 대학을 구조조정하기는커녕, 대학생 숫자만 늘리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정부는 부실 대학 학생들에게는 국가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대학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대학 구조조정 없이 모든 대학에 똑같이 장학금 예산을 나눠주는 정책은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