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자산 비정상적 폭락 팔지도 않았는 데 큰 손실 시장 가격 공정한가 의문

이번 경제위기가 미국에도 버겁긴 버거운 모양이다. 그동안 종교처럼 받들고, 또 다른 나라에 강요해온 '시장에 대한 무한 신뢰'를 이번 위기 앞에서 스스로 버리는 모습이다. 지난 2일 미국 재무회계기준위원회(FASB)는 시가(時價)평가제(mark-to-market)의 기준을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FASB는 이번 개정된 내용을 오는 6월 종료되는 회계기간부터 적용하며, 3월15일 종료된 것도 소급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시가평가제는 자산의 가치를 시장 가격으로 평가하는 회계기준. 이번 조치는 시장 가격을 믿을 수 없다는 고해성사나 다름없다.

미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프랑스, 일본 등 벌써 상당수의 국가가 미국보다 먼저 지난해 시가평가제 기준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회계기준을 개정했다.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도 회계기준을 이미 개정한 상태인데, 유럽의 각국은 추가 개정을 요구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시가평가제 완화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블랙 스완(Black Swan)'이라는 책을 통해 이번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한 투자전문가 나심 탈레브(Talev)는 "시가평가제 완화로 오히려 금융 시스템의 불확실성이 증가할 것"이라며 "이번 조치는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혹평했다.

미국 4대 상업은행 중 하나인 웰스파고(Wellsfargo)는 지난주 예비 실적발표에서 개정된 시가평가제를 적용, 1분기 30억 달러 순이익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누리엘 루비니(Roubini) 뉴욕대 교수는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웰스파고가 변경된 시가평가제도를 이용해 부실을 숨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가평가제를 도입했지만, 규정이 미국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미국과 달리 매도 가능용 자산의 시가가 하락하였다는 것만으로 이를 당기손실로 잡아야 한다는 규정이 명시적으로 없다. 단지 채권 발행기관의 신용위험(예를 들면 부도 위험)이 높아져서 회수 가능성이 낮아지는 경우만 손실로 잡고 있다. 한국은 FASB가 이번에 완화한 규정을 이미 일부 채택하고 있었던 셈이다.

최근 논란을 촉발시킨 시가평가제는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이번에 FASB가 개정한 내용은 무엇인가?


■시장 가격은 공정한가?

기업의 자산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산에 가격을 매겨야 한다. 이를 위해 통상 구매자와 판매자가 모두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공정가치(fair value)를 산출하고, 이를 회계 장부에 자산 가격으로 반영한다.

시가평가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을 공정가치로 평가하는 제도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1년 '엔론 회계부정 사태' 이후 회계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이를 강화했고, 우리나라에선 1990년대 후반 IMF의 권고로 이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 금융위기로 금융자산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폭락하자, 과연 시장 가격이 공정가치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기업 입장에서는 아직 팔지도 않았고 팔 의사도 없는 주식이나 채권, 파생상품의 시장 가격이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큰 손실을 본 것처럼 회계장부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금융자산의 시장 가격이 폭락해 회계상 큰 손실을 기록할 경우 투자자들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결국 외면받게 된다는 점이다.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자. 금융자산은 매매 의사와 상품의 종류에 따라 '단기 매매용'과 '만기 보유용', 그리고 '매도 가능용'의 3가지로 구분된다.

단기 매매용이란 통상 단기간 내 매매 차익을 목적으로 빈번히 거래하는 주식이나 채권 등을 말하며, 시장 가격을 곧바로 장부의 손익으로 반영한다. 만기 보유용은 이미 시가평가제의 대상이 아니어서, 가격 하락이 일시적이 아닌 경우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시장 가격을 회계장부에 반영할 필요가 없다.

문제가 된 것은 매도 가능용 금융자산이다. 기업들은 가급적 금융자산의 손실을 손익으로 반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장 당기손실이 발생하면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하거나 추가 투자를 꺼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매도 가능용 금융자산은 이런 이유로 일시적으로 가격이 변동하더라도 이를 곧바로 당기손익 계산에 반영하지 않았다. 대신 '자본 조정'이란 항목으로 처리했다. 단기간 내 매매차익의 실현을 목적으로 취득한 것이 아니며, 매각 전에 언제든지 가격이 다시 회복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가격 하락이 일시적이 아닌 경우(예를 들어 통상 6개월 이상 장기간 큰 폭으로 하락했을 때)에는 그 차액을 모두 당기 손익 계산에 포함하도록 했는데, 그동안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 별 이슈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로 장기간 손실이 발생했고, 기업들이 이를 당기손실로 반영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자 시가평가제 완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번 시가평가제 예외 규정의 대상도 대부분 매도 가능용 금융자산이다.


■미국 시가평가제는 어떻게 바뀌었나

FASB가 이번에 바꾼 내용은 크게 3가지다.

1. 애매모호했던 시가평가제 예외 규정 명시

시가평가제는 원래 시장의 정보를 제대로 기업 회계에 반영하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진 상황에서는 금융자산, 특히 매매 가능용 금융자산의 시가가 오히려 시장 정보를 정상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왜곡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FASB는 시가평가제를 적용하지 않아도 되는 예외 상황을 이번에 명시적으로 정리했다. (미국 재무회계기준위원회 스태프 의견서(FAS) 157-4)

첫째, 금융자산의 거래 규모와 수준이 급격히 줄어드는 경우다. 한두 건의 극소수 거래를 시장 가격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거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미 체결된 거래의 가격 차이가 비정상적으로 클 때, 유동성 부족에 따라 프리미엄이 급격히 높아졌을 때 등으로 명시했다.

둘째, 금융자산의 거래 환경이 비정상적일 때도 시가평가제의 예외로 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금융자산을 매각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을 수 있다. 또 정부나 공적 기관 등 특정 상대와만 거래해야 할 때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금융자산의 가격을 산정할까. 이에 대해 FASB는 기업 스스로 적합한 가치평가 모형을 사용해서(mark-to-model) 합리적인 방법으로 추정하도록 했다. 기업의 재량권이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회계학자는 이번 조치가 기업들로 하여금 파생상품의 가치를 자의적으로 평가(mark-to-myth)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2. 금융자산 가격 하락을 장부에 반영하는 방법 변경

그다음은 금융자산의 가격을 어떻게 장부에 반영하느냐의 문제다(FAS 115-2와 124-2). 이전에는 금융상품의 가격이 장부 금액보다 하락(손상·impairment)하고, 그러한 하락이 일시적이 아닌 경우, 이를 모두 손익계산서상 당기손실로 반영했다.

하지만 FASB는 이번에 만기 보유용과 매도 가능용 자산의 가격이 폭락하더라도 당기손실 계산에 반영하지 않을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를 규정했다.

즉 신용 손실(채권 발행기관의 신용도 저하로 비롯된 가격 하락분)에 해당하는 부분만 당기손실로 나타내고, 나머지 부분은 자본조정으로 처리해서 손익계산서에 표시하지 않고 직접 자본의 감소로 나타내도록 했다. 이 경우 기업으로서는 당장 당기손실이 발생하지 않고, 자본만 감소하게 된다. 비록 자본 감소로 기업의 체력은 떨어질 수 있지만, 당장 질병(당기손실)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금융자산을 매각할 의사가 있거나, 운영비용 등 자금 사정을 볼 때 금융자산을 매각할 가능성이 큰 경우에는 금융자산 가격 하락을 당기손실로 처리하도록 했다.

3. 공시(公示) 기준 강화

FASB는 이처럼 시가평가제의 회계 기준을 완화하는 대신 공시 기준을 강화했다(FSP 115-2와 124-2). 즉 기업이 어떻게 금융자산의 공정 가치(fair value)를 계산했는지, 그 과정을 1년 1회 공시에서 1년 4회 공시하라고 강화했다.

그러나 이렇게 공정가치의 계산법을 공시한다고 해서, 일반투자자가 복잡한 계산법을 이해해 제시된 가치가 공정한 가치인지 판단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앞서 설명한 것처럼 기업이 가치를 평가할 때 재량권은 늘어났지만, 투자자들이 평가가 제대로 됐는지 판단하기란 예전보다 더 어렵다는 이야기다.

▲

■계속되는 찬반 논쟁

월가(街)는 이번 시가평가제 완화로 은행들의 이익이 약 20% 늘어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장부상 이익이 늘어나면 은행들은 신주를 발행해 시장에 매각해서 현금을 확보할 수도 있다. 또 채권자들이 은행으로부터 만기가 돌아온 원금을 상환받지 않고 차환해 주는 경우도 증가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은행들은 현재의 부도 위기에서 살아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최근 벌써 HSBC가 신주를 발행했으며, 골드만삭스도 신주 발행 계획을 이번 주초에 발표했다.

버냉키(Bernanke) 미 연준(FRB) 의장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금융자산 가격을 합리적으로 회계에 반영할 수 있게 됐으며, 공시를 통해 기업들이 금융자산 가격을 왜곡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Krugman) 프린스턴대 교수는 시가평가제를 완화한 데 대해 "시간 끌기 전략일 뿐"이라며 "부실자산의 인식과 처리가 지연돼 더 큰 문제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시가평가제(mark-to-market)

기업이 보유한 자산의 가치를 시장 가격으로 평가하는 회계기준을 말한다. 1990년대 이후 시장 상황을 가감 없이 기업 실적에 반영하겠다며 국제회계기준부터 시작해서 각국 회계기준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1년 '엔론 회계부정 사태' 이후 회계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강화됐다. 우리나라도 1990년대 후반 IMF의 권고로 이 제도를 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