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8일, 뉴욕 맨해튼 11번가를 향해가는 버스 안. 미니스커트 차림의 관광 가이드가 버스 안에 설치된 비디오의 장면을 가리키며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50여 명의 여성 관광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 소리를 지른다. “매그놀리아 베이커리(Magnolia Bakery)죠!”
‘온 로케이션 투어(On Location Tours)’라는 회사가 운영하는 ‘섹스앤더시티(Sex and the City) 관광’. 이 관광코스는 약 4시간 동안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주인공들이 살던 아파트와 식당, 쇼핑몰 등을 쭉 돈다. 엄마와 함께 왔다는 독일인 리오나(23)양은 “오늘 하루만큼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먹고, 입고, 쇼핑하고 싶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 이야기가 상품으로
섹스앤더시티 관광에서 상상 속으로 그렸던 주인공들의 일상은 투어 버스에 올라탄 관광객들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로 되살아난다. 그들은 자신이 꿈꾸어 온 드라마 주인공들의 삶을 체험하는 데 돈을 쓴다. 이 투어의 참가비는 32달러(3만원).
하지만 드라마의 배경으로 나오는 레스토랑이며 쇼핑몰을 거치다 보면 관광객 1명당 600~700달러(56만~66만원)는 기본이라고 조제트 블라우(Blau) 사장은 전했다.
이야기 경제에서 드라마와 영화는 더 이상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소비자의 꿈과 감성을 자극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낸다. 그리고 소비자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뉴욕에서는 섹스앤더시티 관광 외에도 시트콤 ‘프렌즈’나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스파이더맨’ ‘수퍼맨’ 등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막대한 관광 수입으로 연결되고 있다. 뉴욕 경제가 이야기 산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연간 27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뉴욕시 재정 수입의 약 10%에 해당하는 19억 달러가 이야기 산업에서 나왔다는 통계도 있다.
이야기가 가치를 창조하는 시대
이야기 산업의 수익 모델은 타임워너, 20세기 폭스, 소니 콜롬비아 같은 미국 할리우드의 이야기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기업이 월트디즈니(Walt Disney)다.
덴마크의 미래학자 롤프 옌센(Jensen)은 “디즈니는 구석기시대의 원시인부터 안데르센의 동화를 거쳐 인디언 소녀의 삶에 이르는 수없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수천 가지 상품으로 만들어 팔아 막대한 이윤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할리우드의 이야기 기업들은 자신의 이야기꾼(storyteller)들이 창조해 낸 다양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영화·애니메이션·드라마·소설·게임 같은 콘텐츠로 재창조한다.
할리우드 이야기 기업들은 애니메이션은 한국에, 컴퓨터 그래픽은 뉴질랜드에, 캐릭터 인형은 중국에 하청을 준다. 이렇게 생산된 콘텐츠는 영화·TV·DVD·CD롬·인터넷 등 가능한 모든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며, 여행 코스나 장난감의 모습으로 팔리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할리우드가 재생산한 이야기의 산물로 뒤덮여 있다. 아이들은 TV에서 ‘슈렉’ 만화영화를 보고, ‘파워퍼프걸’이 그려진 운동화와 가방을 메며, ‘곰돌이 푸우’ 이불을 덮고 ‘백설공주’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든다. 그동안 할리우드 이야기 기업들의 지갑은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
2006년 디즈니의 매출은 총 353억 달러로, 세계 1위 반도체 기업 인텔(315억 달러)을 추월했다. 영업 수익률은 무려 16%. 기업분석가 윌리엄 캐포다글리(Capodagli)는 “디즈니의 수익성은 인텔(18%)과 맞먹고 도요타(7%)를 압도한다”며 “앞으로 이 차이는 더욱 벌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래의 부자는 탁월한 이야기꾼
이야기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세는 세계 경제의 큰 흐름을 ‘정보화 경제’에서 ‘이야기 경제’ 쪽으로 돌려놓고 있다. 이야기 산업의 핵심 분야인 문화·콘텐츠 분야를 보면, 2007년 세계 시장 규모가 1조5252억 달러에 달하며, 매년 6~8%씩 급성장하고 있다.
2005년 미국과 영국의 경제 성장률은 각각 3.2%, 1.8%에 불과했지만, 이들의 문화·콘텐츠 산업 성장률은 각각 4.8%, 4.3%에 달했다. 제조업이 초고속 성장하고 있는 중국마저 2005년 이야기 산업 성장률(26%)이 경제성장률(10.2%)의 2.5배에 달했다.
세계의 부(富)도 이야기 산업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Rowling)이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Gates)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회장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개인 자산의 총액은 게이츠 회장이 51조원, 롤링이 1조130억원으로 아직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6년간 재산 증가율은 게이츠가 6.25%, 롤링이 141%였다. 2003년 빌 게이츠는 주식 배당금으로 450억원을 벌었지만, 조앤 롤링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저작권만으로 1000억원을 벌었다.
게이츠가 정보화 경제의 ‘혁신가’라면, 조앤 롤링은 이야기 경제의 ‘이야기꾼’이다. 이야기 경제의 부의 증가 속도가 정보 경제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 간 실적을 비교해 봐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근 4년간(2004-2007) 순이익 증가율은 18%였지만, 월트디즈니 순익은 같은 기간 41.4% 늘었다. ‘이야기’의 경제적 가치 창출 능력이 ‘기술’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드라마 작가 김수현씨가 드라마 대본 저작권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엔터테인먼트 기업에 투자해 ‘이야기 부자’ 등극을 꿈꾸고 있다.
정보화 사회가 싹을 틔운 지 20여 년. 다시금 시대의 풍향은 바뀌고 있다. 머지않아 조앤 롤링 같은 이야기꾼들이, 빌 게이츠나 멕시코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Slim), 인도의 철강 재벌 락시미 미탈(Mittal)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가 곧 돈인 세상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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