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킨 리미티드 에디션

제품마다 고유번호… 작년 전세계 매출 1조8000억원
“장인에게 영감을” 다양한 문화활동 지원

<이 기사는 weekly chosun [1954호] 에 게재되었습니다>

지난 2월 26일 서울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본점(명품관) 정식 개점을 이틀 앞두고 신세계 이명희 회장이 이곳을 찾았다. 이 회장은 에르메스(Hermes) 매장을 방문해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1억9000만원이 넘는 버킨 백을 봤다. 평균 2500만원 하는 쏘나타 승용차를 8대 살 수 있는 값이다.

 “이런 걸 사는 사람도 있나요?”(이 회장) “벌써 두 개나 예약 주문이 들어왔습니다.”(매장 관계자) 이 회장은 “나도 하나 주문해도 되겠네요”라며 웃었다. 이날 이 회장의 손에 들려있던 핸드백도 악어가죽으로 된 3500만원짜리 에르메스 제품이었다.

‘버킨(Birkin) 백’은 1970년대 말 활약했던 프랑스의 샹송 가수이자 영화배우인 제인 버킨의 이름에서 따왔다. 1984년 제인 버킨은 비행기 속에서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를 만났다. 언제나처럼 제인 버킨은 밀짚으로 만든 시장 가방 같은 것에 온갖 잡동사니를 넣어 다녔다. 이를 본 에르메스가 모든 용도에 적합한 검정색 가죽 가방을 제작해줬다. “가방에 세상과 꿈을 담고 다니는 사람을 위해서”라면서.

미국의 인기 시트콤 ‘섹스 앤 더 시티’에선 홍보 전문가인 사만다가 버킨 백을 구하려고 애쓰는 장면이 있다. 자신의 고객인 할리우드 스타의 이름을 대고 물건을 빨리 받으려다가 들통나서 망신당한다. 버킨 백은 이렇게 “비싸서”가 아니라 “없어서” 못 파는 제품이다. 사이즈나 가죽 등 세부 주문 사항이 생기면 대기 시간은 더 길어진다.  가죽 제품은 600만원 선으로 악어가죽의 경우엔 1000만원을 너끈히 넘는다. 특수장식이 더해지면 3000만~4000만원에 이른다. 갈색 같은 인기 제품은 주문한 뒤 몇 년을 기다려야 손에 쥘 수 있는 ‘명작(名作)’으로 통한다.

▲ 켈리 플러치 2004 한정판

이 버킨 백은 오렌지빛 상자에 초콜릿빛 리본, 말과 마차 모양의 로고로 상징되는 오늘날 에르메스 브랜드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이곳 제품은 어느 것 하나 “나 에르메스 것이야” 하면서 로고를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손톱보다 작은 곰돌이와 펭귄이 올망졸망 늘어서 있는 고운 빛깔의 넥타이, 연한 하늘색이나 연한 분홍빛 감도는 송아지 가죽 코트, 바닷속이나 밀림 같은 동물의 왕국이 펼쳐진 듯한 커다란 스카프, 한 세트에 1000만원에 가깝다는 고풍스런 말 모양의 식기류…. 현재 세계 각국에 210곳이 넘는 매장을 운영하는 에르메스 그룹의 2006년 전체 매출액은 15억1490만유로(약 1조8000억원)에 달한다.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가 100년 넘는 장인의 기술을 자랑하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에르메스 가죽 아틀리에에서 일하는 가죽 장인은 500여명. 3년간 ‘에르메스 가죽 장인학교’ 과정을 졸업한 뒤 2년의 수련 기간을 거친 이들이다. 재단된 가죽 재료가 담긴 트레이가 각각의 장인이 속한 작업 데스크로 배달되고, 가방마다 제작된 데스크 번호와 제작 연도가 찍힌다. 수십 년이 흘러도 수선·교환은 100% 보장된다. 에르메스 백에 가죽으로 쓰이려면 악어도 싸움을 많이 해 스크래치가 많거나 땀구멍이 대칭으로 고르게 분포돼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최고급 소재와 장인의 기술이 뒷받침됐다고 한들 모든 럭셔리 브랜드 제품이 에르메스 같진 않다. 이곳 제품은 연필 한 자루에 7만5000원, 명함 지갑이 수십만원 하는데도 사겠다는 매니아가 줄을 잇는다. 과장된 면도 있겠으나 에르메스 매니아층이 특히 두터운 일본에선 버킨 백을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3만~4만명에 달한다는 얘기도 있다.

1837년 프랑스 파리의 마들렌 광장에 티에리 에르메스라는 사람이 마차에 필요한 용구와 안장 등을 파는 마구상(馬具商)을 열면서, 오늘날의 에르메스가 탄생했다. 브랜드 스토리 자체도 역사지만 에르메스는 끊임없이 ‘역사’와 ‘꿈’을 만들어 판다.

버킨 백과 함께 최고 인기인 ‘켈리(Kelly) 백’도 그렇다. 1837년 사냥하러 나가는 기수가 쓰던 ‘새들 캐리어(Saddle Carrier)’에서 비롯된 이 백은 ‘프티 삭 오트(작은 백이란 뜻)’라 불렸다. 그러다가 1956년 모나코 왕비가 된 영화배우 출신 그레이스 켈리가 이 백을 든 모습이 한 잡지에 실리면서 ‘켈리 백’으로 불렸다. 당시 켈리는 임신 사실을 숨기려고 커다란 사이즈의 에르메스 빨간색 악어가죽 백을 들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켈리 백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최고급 고가 브랜드인 에르메스는, 어떤 나라에 언제 상륙했는지만 봐도 그 나라 국민의 소득과 소비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고들 한다. 우리나라엔 IMF 위기였던 1997년 에르메스 코리아가 처음 생겼다. 그리고 9년 만인 지난해 11월, 서울에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에르메스 부티크가 들어섰다. 서울 강남의 도산공원 앞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는 에르메스 브랜드의 ‘얼굴’로 일본·중국 등지에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요즘 에르메스는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메세나 활동에 주력한다. 장인에게 좋은 영감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일까. 에르메스 코리아는 젊은 아티스트를 선정해 지원하는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을 2000년부터 개최해오고 있고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문화 행사에 후원하고 있다. ▒
 

에르메스의 혁신과 모험 정신

말안장 스티치, 벨트에 사용…
세계 최초로 가방에 지퍼 달기도

에르메스라고 하면 클래식하고 고풍스럽다는 이미지부터 떠오르지만 실은 혁신과 모험 정신을 늘 강조해왔다. 말안장을 만들 때 쓰는 박음질법인 ‘새들 스티치’를 벨트와 장갑 등에 쓰거나 고급 승마 블라우스에 사용되던 실크에서 모티브를 찾아 스카프를 만든 것은 20세기 초 당시로선 ‘혁명’이었다. 지금은 흔해진 데님 재킷에 짧은 스카프를 두른 차림도 1980년대 초 에르메스가 처음 내놓았다고 한다.
세계 최초로 지퍼를 단 가방도 에르메스가 1923년 만든 볼리드(Bolide) 백이다. 지퍼에 대한 특허를 가진 에르메스는 당시 지퍼로 여닫는 가방을 독점적으로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한다.
 

에르메스는 1년에 두 번씩 열리는 신상품 행사 때마다 새로운 소재와 색상, 디자인의 백을 선보인다. “인기 품목만 만들게 되면 장인들의 손끝이 무뎌져서”라는 게 에르메스 측의 설명이다. ‘가족처럼 내게 필요한 것, 나랑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강조하면서 최근 미니 라디오, 종이 커터, 골프 티(Tee)용 휴대 케이스, 반짇고리 같은 소지품 라인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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