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차가워지는 겨울은 와인러버, 특히 와인을 사랑하는 주당들에게는 참 행복한 계절입니다.방어회는 피노누아를 부르고 굴은 샤블리를 부르고 게와 새우는 샤도네이를 부르고. 상상만 해도 침이 쫙 고이는 계절이죠.
그리고 겨울 제철 해산물로는 과메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아직은 수분이 덜 빠져서 꼬들하고 농축된 기름맛은 덜하지만 그래도 제철 과메기를 빨리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포항 구룡포 햇과메기를 11월 마지막 주에 주문해봤습니다.
과메기는 꼬챙이로 청어의 눈을 뚫어 말렸다는 의미의 '관목청어'에서 나온 말로 '관목'을 '관메기'로 부르다가 ㄴ받침 탈락으로 '과메기'라는 명칭이 되었다고 하네요. (포항시 과메기 홍보관 누리집)
아무튼 1800년대 문헌부터 관목어가 등장하고 임금님께도 진상된 겨울철 진미였는데 서민인 제가 만원 대로 1인분을 택배로 진상받아 먹으니 참 좋은 세상이죠.
과메기 중에는 더 기름맛이 녹진한 청어 과메기도 있지만 아직 제철 초기라 비린 맛이 적은 꽁치 과메기로 주문해봤습니다. 예전에는 눈을 꿰어 널어 말렸다면 요즘엔 생선의 기름기가 꼬리에 몰리지 않도록 발에 넓게 널어 말리기도 한다고 하네요.
아쉽지만 집에서는 저만 과메기 맛을 아는 어른 입맛이라 1인분을 주문했는데 통통하지 않고 날씬하게 마른 과메기들로 왔네요. 2-3인분 넉넉하게 주문할 때 좀 더 통통하게 살 오른 과메기들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일과 생선은 클수록 비싸고 맛있다지만 입에 가득차는 만족감이나 식감의 차이지 맛 자체가 다를 것은 없기에 1인분 7미를 먹기좋은 사이즈로 잘라 준비합니다.
과메기를 먹기 위해 귀가 길에 막걸리 한 병을 사왔는데 올해 첫 과메기라 그런지 와인을 마시고 싶은 핑계인지 몰라도 화이트와인을 마셔야 특별한 하루의 마무리가 될 것 같더라구요.
찾아보면 과메기의 꿀 조합 와인은 '소비뇽블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과메기에 소비뇽블랑 매칭을 추천한 기사가 4~5년 전에 있었고 이를 계기로 '과메기 와인'으로 여러 차례 검색을 시도한 와인러버들이 자연스럽게 안전한 조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네요.
마침 제 셀러에 칠링된 와인 중 소비뇽블랑이 없었기도 하고 안전한 선택보다는 아직 모험을 좋아하는 '영포티'라서 제 선택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고 현지인들이 맥주처럼 편하게 마시는 화이트와인 '그뤼너 벨트리너' 입니다.
그뤼너 벨트리너는 비엔나 소시지에 씨겨자를 찍어 먹으며 함께 마셔도 참 좋지만 특유의 스파이시함 때문에 한식과의 매칭이 좋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초장과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고 워낙 산도가 좋기 때문에 과메기의 기름진 맛을 잘 잡아주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셀러에 잠들어 있던 그뤼너벨트리너는 '도메너 크렘스' 22년 산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과메기와의 조합이 정말 좋았습니다. 스파클링 와인이 아니라서 탄산이 전혀 없음에도 혀에서는 쨍함이 느껴졌는데 이는 후추 계열의 스파이시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기대했던 초장이 아니라 과메기 향신채 3총사 '쪽파 마늘 청양고추'와 아주 기막히게 어우러지더라구요. 특히 과메기에 함께 오는 생편마늘은 한지형 마늘이라 여름에 보양식으로 장어구이와 함께 먹는 마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독 알싸하고 매운 것이 특징인데요.
쌈추에 돌김, 초장찍은 과메기, 편마늘, 쪽파, 꼬시래기를 얹어 한 쌈 입에 넣고 그뤼너벨트리너를 한잔 마시는데 맵싸한 마늘과 스파이시한 그뤼너벨트리너가 어렸을 때 먹었던 사탕 '톡톡'처럼 정신없이 입 안에서 튀고 머리 속이 맑아지네요.
이해할 수 없던 MZ 친구들의 '엽떡' '불닭볶음면' 취향을 이해할 수 있었던 순간이라고 할까요. '엽떡'에 '쿨피스'같은 존재가 소비뇽블랑이라면 '사이다' 같은 존재는 그뤼너벨트리너라고 단연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분하게 마무리하고 싶은 저녁엔 과메기에 부드럽고 안전한 조합인 소비뇽블랑, 피로와 스트레스를 확실하게 풀고 싶은 날엔 그뤼너벨트리너를 꼭 시도해보시길 추천해봅니다.
그뤼너 벨트리너는 코로나 이전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비인기 품종이었기 때문에 운 좋으면 마트 장터에서 저렴한 가격에 일명 '득템'이 가능했지요. 물론 수입사에서는 피눈물을 흘리셨겠지만요.
그 때마다 저는 쾌재를 부르며 '아니 어떻게 이 가격에 이 맛이야~' 하면서 마셨었고 지금은 가격이 좀 올랐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직 국내 시장에서는 품질 대비 가격이 매우 저렴한, 저평가된 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그뤼너 벨트리너는 한식 뿐 아니라 태국, 베트남 음식 등 항신료를 풍부하게 쓰는 아시아 음식과의 좋은 마리아주를 기대해볼 수 있는데요. 저는 태국 음식과는 환상적으로 맛있게 마셔봤고 아직 해보진 않았지만 언젠가는 커리, 난, 탄두리 같은 인도 음식과도 한번 매칭해보고 싶은 와인입니다. 편의점, 마트, 백화점, 와인샵 어디든 좋습니다. 손에 잡히는 그뤼너 벨트리너를 올 겨울 과메기와 함께 꼭 한번 시도해보세요.
비비노 평점 3.7 / 국내 수입사 아영에프비씨 / 가격 2~3만원 대
<필자 에버포티 소개>
22년 차 IT 업계 직장인. 주력 25년 차, 와인력 10년 차의 한 때는 주당. 40대 중반인 지금은 70대 초반까지 건강을 잃지 않고 지속가능한 음주를 하기 위해 양은 줄이고 질은 높이는 주생활을 추구하는 중이며 이탈리아의 모든 와인과 이외 힘주지 않은 모든 화이트와인을 사랑합니다. 물론 샴페인은 힘줬어도 사랑합니다. 요즘엔 전통주도 참 사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