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잼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름 하나면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어떤 작품에서도 적재적소의 연기를 보여주는 연기파 배우 조정석도 그런 배우 중 하나다. 조정석은 영화 '건축학개론' 속 '납뜩이'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뒤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질투의 화신', 영화 '관상', '엑시트' 등에서 장르를 오가는 호연을 펼쳤다. 그런 그가 다시 한번 '조정석'이라는 이름 석 자를 내세운 영화를 선보인다. 여장 변신에 말맛까지 더한 영화 '파일럿'이다.
영화 '파일럿'은 스타 파일럿에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한정우'(조정석)가 파격 변신 이후 재취업에 성공하며 벌어지는 코미디를 다룬 영화, 극 중 조정석은 인기 파일럿이었다가 실직하게 된 '한정우'를 연기했다. 한정우는 다시 파일럿으로 일하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여동생 '한정미'의 신분을 빌려 항공사에 취업한다.
지난 1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파일럿' 개봉을 앞둔 조정석을 만났다. '파일럿'은 조정석이 영화 '엑시트' 이후 5년여 만에 선보이는 스크린 복귀작이다. '엑시트'가 여름 극장가에서 큰 호평을 받았던 만큼, 조정석은 "아직까지는 설레기도 한데 긴장이 된다"라고 운을 뗐다. 개봉에 앞서 진행한 시사회 전날에는 잠도 잘 못 잘만큼 떨렸다고 말한 조정석은 "다행히 주변 분들 반응이 좋아서 되게 기분이 좋다"라며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정석은 스크린, TV, 무대를 막론하고 활약하는 만능 배우 중 하나다. 5년 만의 스크린 복귀지만, 그동안 그는 쉼 없이 작품을 했다. "저는 5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촬영을 했는데 많은 분들이 '뭐 하고 있냐'라고 물어보시더라(웃음)"라며 "그 사이에 '행복의 나라', '파일럿'도 찍고, 드라마 '세작'도 촬영했다. 영화가 오랜만에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일부러 늦게 나온 건 아니고 작품이 나오는 시기가 그렇게 됐다"라고 전했다.
조정석은 '뺑반'에서 함께했던 한준희 감독과 '파일럿'에서 재회했다.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한준희 감독님을 부산에서 만났는데 그때 제안을 받았다"라고 운을 뗐다. 이어 "감독님은 부산국제영화제 때문에 부산에 오셨고, 저는 촬영이 있어서 갔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차 한잔하는 자리인 줄 알고 갔는데 작품을 제안해 주셨다"라며 "저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조정석'이라는 자신이 캐릭터에 잘 대입이 됐다. 술술 잘 읽혔고, '나라면 이렇게 할 것 같다'하면서 톤도 떠오르더라. 그렇게 '한정우'가 된 제 모습이 연상되고 머릿속에 그려졌다"라고 떠올렸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잼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미 뮤지컬 '헤드윅'에서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선보인 조정석에게 여장남자 설정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헤드윅'과 결이 다른, 현실 직장인 '한정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생각보다 고난이었다.
"분장팀도 그렇고, 처음에 여장한 제 모습을 봤을 때는 많이 아쉬워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분장과 의상을 테스트하는 시간을 정말 많이 가졌다. 사흘 정도 하루에 거의 대여섯 시간을 할애하면서 완성된 게 지금의 모습이다. 긴 머리도 해보고 쌍꺼풀 테이프도 붙여봤는데 모두 탈락했다. (비주얼이) 도저히 안되겠더라.(웃음) 결국 결정된 게 작품에 나온 모습이다."
"처음에 테스트 촬영할 때는 (여장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는데, 비주얼이 확정된 다음부터는 준비하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확실히 이너웨어부터 다르니까 의상을 입었을 때 느낌도 달랐다. 하지만 '헤드윅'을 했기 때문에 (여장이) 생경하거나 하지 않았고, 제 몸이 잘 수긍한 것 같다."
여장한 조정석의 모습을 본 네티즌들은 닮은 꼴 여배우를 찾아내기도 했다. 조정석은 여장한 자신과 닮은 꼴로 거론된 배우 최강희와 박보영을 언급하며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두 분을 닮았다고 해주시니 저는 너무나 영광이다. 그렇게 듣고 보니 진짜 조금 제 모습에서 두 분의 모습이 보이더라. 그런데 지금 정말 죄송한 마음이다. 정말 약간 닮은 것뿐인데 기사도 나와서 죄송하다.(웃음)"
'파일럿' 속에는 '한정우'의 강력한 조력자가 등장한다. 바로 혈육 '한정미'다. 뷰티 인플루언서를 꿈꾸는 한정미는 추문으로 회사에서 잘린 오빠 한정우에게 신분을 빌려준다. 범죄인 것을 알지만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오빠의 협박에 기꺼이 응한다. 조정석과 한선화, 두 배우는 실제 남매 못지않은 케미스트리로 공감을 자아냈다. 조정석은 한선화와의 호흡을 묻는 말에 "왜 이제야 만났을까 싶었다"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한선화 씨가 에너지가 정말 좋다. 제가 '술꾼도시여자들'도 정말 재밌게 봐서 선화 씨가 캐스팅됐다고 했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라며 "오빠 동생 관계가 재밌게 그려져야 했는데, 막상 연기를 해보니까 (한선화 씨와의 연기가) 정말 재밌었다. 왜 이제 만났나 싶더라"라고 회상했다.
극 중 여장한 한정우의 파일럿 동료이자 특별한 존재가 되는 '윤슬기' 역을 맡은 이주명과의 호흡도 언급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카메오로 출연했던 이주명을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도 눈여겨봤었다고 말한 조정석은 "주명 씨라는 사람이 가진 캐릭터 자체가 너무 좋더라. 연기가 좋은 후배, 눈에 띄는 후배가 있지 않나.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구나'라는 걸 느낄 때가 언제냐면 실제 만나서 그 사람의 인성을 느꼈을 때다. 저는 인성과 연기는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인성이 연기에 묻어나는 것 같다. 주명 씨에게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라고 칭찬했다.
조정석은 좋은 배우로서의 자질로 인성을 강조했다. 20여 년 연기 생활을 하며 얻은 이치였다. 그는 인성이 좋은 사람은 관계에도 그 면모가 베어 나온다며 깨달음을 전했다.
"무대에서의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까 어느 순간 어떤 깨달음 같은 게 왔다. 제가 2004년 스물다섯 살에 '호두까기 인형'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20대 때는 그런 생각조차 안 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제가 4학년 5반으로서 말씀드리면(웃음), 좋은 인성을 가진 누군가와 그렇지 않은 누군가가 연기를 시작한다면, 좋은 인성을 가진 쪽이 더 연기를 잘 할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사람과 더 많은 사람이 일을 하고 싶어 하고, 혹여 못된 사람을 만나도 (경험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조정석은 특유의 긍정 에너지로 극복해왔다.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배우가 되기 위한 그의 여정은 현재진행형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슬럼프나 트라우마, 징크스 같은 것들을 아예 안 만들지 않는다.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은 그날의 루틴 같은 게 있는데 저는 그런 게 없다. 배우 생활을 하면서 되게 힘들고 번아웃이 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럴 때는 아무 생각 안 하고 온전히 쉬면서 일과 사람 조정석을 분리한다. 그러다 보면 힘이 난다."
"주저하지 말고 많이 시도하고, 도전을 두려워하거나 실패와 성공을 규정짓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성공하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정진하면 더 나은 배우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