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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정은 "평범한 역 못할 것 같다는 혹평? 열심히 하고 있으니 사랑해주세요"

이우정 기자 ㅣ lwjjane864@chosun.com
등록 2020.11.14 00:30

'내가 죽던 날' 이정은 인터뷰 /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저는 별 재주가 없어요. 상상력이 좋지도 않고, 리듬이 좋지도 않아서 그런 배우들이 부러워요. 저에게는 그런 게 없으니 많이 탐문하고 취재해요. 저를 안정시키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무대와 매체를 통틀어 연기 경력만 30여 년에 달하는 이정은. 영화 '내가 죽던 날' 개봉을 앞둔 어느날 또 다른 도전에 나선 이정은을 만났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함안댁으로 눈도장을 찍더니 이듬해 영화 '기생충'으로 글로벌 클래스에 오른 그는 스스로를 '잘난 게 없는 배우'라며 겸손해했다.

'내가 죽던 날'은 외딴섬 절벽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녀, 그리고 그 소녀의 행적을 좇는 형사, 무언의 목격자까지,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선택을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정은이 맡은 '순천댁'은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섬마을 주민이다.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온 그는 작은 섬마을에서도 유난히 조용하고, 존재감 없이 살아간다. 그런 그의 삶에 '세진'이라는 인물이 끼어든다.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인 '세진'의 거처를 제공하게 된 것. 순천댁은 모든 것을 잃고 외딴 섬에 온 소녀가 자꾸만 눈에 밟히고, 실종된 세진의 사건을 맡은 '현수'까지 마주하면서 삶의 변화를 겪는다.
매체 연기로 넘어온 후에도 다작 배우로 활약해온 그는 '내가 죽던 날'을 통해 농아인 역으로 다시 한번 인생 캐릭터를 경신했다. 그간 쉼 없이 달려온 이정은은 '내가 죽던 날'이 "느려서 좋았다"고 말했다. 전반 전개가 길어지는 탓에 감정을 읽어내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긴 것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했다. 그는 "어찌 보면 자극적인 감정들이 나올 때 사람들의 시간이 쏠리곤 하는데, 영화도 그런 것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나이에서 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같은 작품을 만든다면 관객이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내가 죽던 날'을 보고)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흡이 느린 작품이 별로 없다 보니 더 매력적이더라고요"라며 느림의 미학을 전했다.

영화 '기생충'의 인기로 주목을 받고 있던 중,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과 영화 '내가 죽던 날' 촬영을 동시에 진행했다. 섬과 육지를 넘나들며 촬영했던 터라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섬이 주는 편안함이 좋았다고 했다.

"'기생충'을 하고 가장 바쁠 때 '내가 죽던 날'을 찍었어요. 다양한 층위의 드라마나 영화를 하고 있을 때 찍게 돼서 저는 색채를 다르게 하고 싶었어요. 술자리에 가면 얘기 안하고 술만 먹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타입이에요. 비록 말로 표현하진 않지만 커다란 감정 속에 있는 시간, 관객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섬 촬영이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죠. '동백꽃 필 무렵'이랑 같이 찍고 있던 때였는데, 태풍 때문에 일정이 밀려있었어요. 서울에서 벗어나 찍어서 그런지 집중도는 높더라고요. 제 일상에서 분리돼서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섬이 정말 좋은 곳이었어요"
이정은이 연기하는 '순천댁'은 극 중반을 넘어갈 때까지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그려진다. 말은 하지 않아도 현수를 향해 내뿜는 묘한, 전지적인 눈빛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저는 '어둡다' 이런 거 보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목격자로 있으니 감독님께 '더 스릴 있게 가자'고 한 적도 있어요. 사실은 형사물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휴먼드라마라서 감정이 흐르는 타이밍을 보는 식으로 정리했어요. 어찌 보면 저는 잔 재미를 모호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있어요.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하기도 했고요. 그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 것들이 적절히 조화가 된 것 같아요"

연기 호흡을 맞춘 김혜수, 노정의 조차도 '이정은이 순척댁 그 자체였다'고 평가했으나, 이정은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제가 이 역할을 잘 풀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이 사람이 가진 손바닥의 굳은살과 이 사람이 세월로 감당한 얼굴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아쉽기도 했어요. 해안가 지방에 가보면 어머니들의 피부에서 오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런 걸 더 분장으로 했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정은은 말을 못 하는 데다 배움이 적은 캐릭터의 손글씨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앞서 영화 '옥자'와 '미스터 주'에서 동물 목소리를, 연극 '빨래'에서도 캐릭터 연구에 몰두했었다고 말한 이정은. 이번엔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말을 못 하니까 시골 어머니들 글씨체를 연구하려고 했어요. 마침 그런 시집이 있어서 원본을 구해서 비교해보니, 시골에서 생활을 하고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의 공통적인 필체가 있더라고요. 제가 오른손으로 쓰니까 너무 예쁘고, 왼손으로 쓰면 너무 터무니없어서 엄청 연습했어요"

"제가 별 재주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천재도 아니고, 모를 때는 보따리를 싸 들고 돌아다니는 편이에요. 학습하는 능력이 좋은 건 아니라 돼지 소리를 찾아 다닐 때는 봉준호 감독님이 '감정이 중요한 거지, 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제가 좀 둔해서 그런지 벽에 부딪힐 때도 있어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해야 할 때도 있으니 상상력이 높은 배우들이 부럽고 그런 리듬을 가진 배우들이 부럽지만, 저에게는 그런 게 없어서 많이 탐문하고 취재해요. 그러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편이에요. 어찌 보면 저를 안정시키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연기 경력이 상당한 김혜수와 이정은이지만,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두 연기파 배우의 만남에 대중이 기대가 쏠렸다. 이정은은 매체 연기 경력이 많은 김혜수에게 선한 영향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선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혜수 씨가 만들어주는 분위기가 있어요. 현장을 풀어지게 해요. 다른 현장에서도 들었던 얘긴데, 혜수 씨가 있으면 아우라가 형성되면서 '우리 함께' 이런 느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어떤 기둥이 딱 서있는 느낌이고, 주변에서 그런 기운을 받아요. 제가 스태프 출신이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스태프들을 대하는 느낌을 느끼는데, 혜수 씨처럼 작업을 오래 해온 사람들에 대한 연륜에서 나오는 점들을 느끼게 돼요. 스태프들에게 고생했다고 하는 순간들을 많이 목격했죠"

"제가 연극배우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기회가 된다면 무대에서의 경험들이 저를 만들었으니까(보답하고 싶어요). 연극 배우분들이나 예술계 쪽의 척박한 상황에 놓인 분들에게 의료에 대한 지원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부분에 힘이 되는 사람이고 싶어요. 또 경력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꿈을 잃지 않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간 평범한듯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캐릭터로 눈도장을 찍어온 이정은이다. 특히나 근래 출연작들이 모두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바, 배우로서 느낀 부담감은 없었을까.

"저 주말드라마 때 완전 시달렸어요. 평범한 역을 잘 못 할 것 같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우리 매니저는 다 알 거예요. 제가 연기 못하나 싶었어요. 더 잘하려고 연습하려고 했어요. 포기할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내가 어떤 반성을 가지고 가야 할지 생각해봐야 할 지점인 거죠. 제가 정신력이 튼튼해서 충격이 크진 않지만, 잘 방어할 수 있어요. 계속 잘하는 역만 할 수는 없잖아요.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 응원이 필요해요. 제가 잘될 때 말고 못 할 때도 응원해주시면 좋겠어요. 일본은 무대 배우가 되면 팬이 십 년, 이십 년 길게 간다더라고요. 길게 보는 친구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술 먹고 놀고, 대사도 안 해오는 배우가 아니니까, 열심히 하고 있으니 더 사랑받고 싶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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