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보호냐, 주권침해냐... '양날의 칼' ISD, 정부 승소율 36%

    입력 : 2018.05.14 09:03

    엘리엇 "삼성물산 합병으로 손해" 한국 정부에 7100억원 배상 요구
    특검 수사·재판 결과 들어 압박… 엘리엇, 배상 못받으면 ISD 갈듯


    2003년 러시아 정부는 최대 민간 석유 회사 유코스의 회장을 지낸 미하일 호도르콥스키를 사기와 탈세 등의 혐의로 체포했다. '러시아 석유왕'으로 불린 호도르콥스키는 푸틴 대통령의 정적이었다. 호도르콥스키는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거액의 세금 폭탄을 맞은 유코스는 파산한 뒤 국유화됐다. 2005년 유코스의 전(前) 주주인 유코스(Yukos)유니버설, 헐리(Hulley)엔터프라이즈, 베테랑(Veteran)페트롤리엄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부당한 체포와 과세, 자산 처분 등으로 손해를 봤다"면서 1140억달러(약 122조원)가 넘는 투자자-정부 소송(ISD)을 제기했다. 2014년 헤이그의 국제상설중재재판소는(PCA)는 500억달러(약 53조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2016년 헤이그 지방법원은 "국제상설중재재판소가 분쟁을 중재할 권한이 없는데도 조약을 잘못 해석해 배상 판결을 내렸다"면서 판결을 취소했다. 주주들이 항소해 지금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현대차 지배 구조 개선을 요구하며 공격 중인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우리 정부에 ISD 소송 제기를 공식화하고 나섰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정부의 위법행위로 자신들이 손해를 봤으니 6억7000만달러(약 7158억원)를 배상하라는 것이다.


    ◇투자자-정부 소송은


    투자자-정부 소송(ISD·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은 투자 유치국 정부의 투자 협정상 의무 위반 등으로 손해를 입은 투자자가 투자를 유치한 정부를 상대로 국제 중재를 요청해 손해를 배상받을 수 있는 제도다. 147개국이 참여한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등 전문성과 중립성을 가진 국제기구가 중재 절차를 수행한다.


    그래픽=김현지


    ISD는 정부의 공공적인 판단에 따른 정책 및 법령,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까지 외국 투자자가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구성된 중재 판정부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어서 주권 침해라는 논란도 있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이나 자본 등 투자자 입장에서 법·제도·언어·문화가 다른 나라에 투자할 때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일 수 있다. 양날의 칼인 셈이다.


    전 세계 2676개 투자 협정 대부분에 ISD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처럼 우리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할 수 있고, 반대로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국 등에 투자하는 우리 기업도 해당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7158억원 배상하라" 엘리엇의 주장은


    엘리엇은 지난달 13일 우리 법무부에 4쪽 분량의 중재의향서를 제출했다. 곧 정식으로 ISD를 제기할 예정이니 일단 만나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자는 것이다.


    중재의향서에 따르면 엘리엇은 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부당하게 개입해 자신과 주주들이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피해액은 7158억원이라면서도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삼성물산 지분을 사 모은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때 합병 비율 등을 문제 삼으며 반대했었다.


    엘리엇은 "합병을 둘러싼 스캔들은 박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까지 이어졌다. 대한민국 법원에서는 박 전 대통령 본인뿐만 아니라 삼성의 고위 간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 등에 대한 형사 재판과 유죄 판결이 잇따랐다"며 "엘리엇에 대한 편견과 (당시) 부패 환경이 아니었다면 합병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 사법 당국은 국내법에 따라 (합병과 관련된) 전 정부 관계자들의 책임을 물었다"며 "한국의 현 정부는 국제법 의무에 따라서 전 정부의 위법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엘리엇은 특검과 검찰, 법원의 수사와 재판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엘리엇 7월쯤 ISD 제기할 듯


    엘리엇의 손해배상 요구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의 두 가지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 국민연금, 보건복지부,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이 한·미 FTA 협정문의 '내국민 대우(11.3조)'와 '최소대우기준(11.5조)' 조항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내국민 대우 조항은 외국 투자자에 대해 같은 상황(like circumstances)에서 내국민과 동등한 대우를 부여할 의무를 말한다. 최소대우기준은 외국인 투자에 대하여 국제관습법상 인정되어 온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정부는 엘리엇의 중재 요청에 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법무부가 중재를 거부하면 엘리엇은 중재의향서를 제출한 3개월 이후 ICSID에 ISD 제기를 할 수 있다. 현재로선 정부가 중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엘리엇과 정부 간 소송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ISD 증가 추세… 개도국이 주된 타깃


    ISD는 선진국 자본이 개발도상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년 분쟁도 증가하는 추세다.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CTAD)에 따르면 2017년 말 투자자-정부 분쟁은 855건이 발생했다. 이 중 548건이 조정이나 판결로 마무리됐고, 297건이 진행 중이다. 결론이 난 분쟁 중 36.5%가 정부에 유리하게 판결이 내려졌다. 투자자가 승소한 경우는 27.9%로 153건이었다. 양측이 조정한 경우는 57건이다. 제소된 국가별로 보면 아르헨티나가 60건으로 가장 많다. 이어 베네수엘라(44건), 스페인(43건) 체코(35건), 이집트(31건) 순이다. 중국은 3건, 미국은 16건인 반면 일본은 한 건도 없었다. 반면 미국 자본이 가장 많은 156건의 ISD를 제기했다.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액수별로 보면 10억달러(약 1조690억원)를 넘는 경우가 90건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10억달러 이상 배상 판결이나 합의한 경우는 10%인 9건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