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냄새 맡은 '늑대 떼' 앞에… 한국 기업은 '경영권 방패' 없어

    입력 : 2018.04.06 09:24

    엘리엇 사태, 왜 자꾸 생기나


    미국 월가(街)의 대표 헤지펀드 서드포인트는 작년 6월 세계 최대 식품 회사인 스위스의 네슬레 지분 35억달러(지분율 1.25%)어치를 매입했다. 서드포인트는 곧바로 "네슬레 실적이 부진하다"면서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과 자사주 매입을 요구했다. 네슬레는 며칠 뒤 24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계획을 밝혔다. 글로벌 화학 회사 다우듀폰은 당초 발표한 분사(分社) 계획을 헤지펀드 요구로 수정했고, 포드·US스틸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헤지펀드 입김에 전문경영인(CEO)을 교체했다. 헤지펀드는 일정 지분을 확보한 뒤 자산이나 사업을 매각하도록 해 주가를 올려 단기 차익을 챙겨 떠나는 전략을 주로 쓴다. 2015년 삼성을 표적으로 삼았던 헤지펀드 엘리엇이 이번엔 현대차를 노리고 있다. 우리 기업이 잇따라 헤지펀드 표적이 되자 투기 자본의 공격을 막을 경영권 방어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칼 막을 방패라도 줘야"


    우리 기업들은 외국과 달리 헤지펀드의 공격에 법적, 제도적 방어 수단이 확보되어 있지 않다. 투기 자본이 스스로 지분 매입 사실을 밝히며 선전포고하면 그때부터 대규모 주식 매입에 나서 대응하는 게 고작이다. 헤지펀드가 늑대처럼 무리를 지어 기업을 공격하는 '울프팩(wolf pack)' 전술을 사용하고, 각종 금융 기법을 이용하고 있지만 우리 기업들은 속수무책이다.



    재계는 포이즌필(Poison Pill)이나 차등 의결권 도입 등 제도적 틀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포이즌필은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경영권 침해 시도가 있으면 기존 주주에게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주는 것이다.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확보해 외부 세력의 공격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기업 경영에 집중할 수 있다.


    차등 의결권은 일부 주식에 특별히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미국·일본 등 주요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 미국 포드차는 창업주인 포드 집안이 7% 지분을 갖고 있지만 차등 의결권에 따라 40%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스웨덴의 발렌베리가도 인베스트사의 지분 19%를 보유하고 있지만 41%의 의결권을 행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포이즌필 등 제도 도입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관련 법안도 국회에 제출됐지만, 논의 자체가 지지부진한 상태다. 투기 자본으로부터 경영권 방어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무능한 경영진의 교체가 어렵고, 기존 대주주의 지배력만 키울 수 있다는 반대 의견도 많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시세 차익만 노리는 투기 자본을 막을 수 있도록 기업에 최소한의 방패라도 쥐여줘야 하는데 편법 상속 등 과거 잘못 때문에 생긴 반(反)기업 정서 탓에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건 안타깝다"고 말했다.


    ◇상법 개정안, 재계 무장 해제 시키는 꼴


    헤지펀드 공격에 아무런 방어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지배 주주 권한을 제한하고 소수 주주 권한을 강화하는 상법 개정까지 추진되자 기업들은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 무리(헤지펀드)를 코앞에 두고 완전히 무장해제되는 꼴"이라고 우려한다.


    여당을 중심으로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은 집중 투표제, 감사위원 분리 선출, 다중 대표 소송제 도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집중 투표제나 감사위원 분리 선출이 시행되면 몇몇 헤지펀드가 뭉쳐 감사위원을 선임할 수 있게 된다. 재무 관련 조사권이나 영업 보고 요구권 등 일반 이사보다 권한이 많은 감사위원은 회사 경영과 관련한 비밀스러운 부분도 들여다볼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외국에 있는 경영권 방어 장치 도입은 외면하면서 외국에서 입법 사례를 찾기 어려운 제도를 만들면 투기 자본이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도록 운동장을 닦아주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투명한 지배 구조로 빌미 없애야"


    전문가들은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제도 도입도 필요하지만 기업들도 기형적 지배 구조 해소, 적극적 주주 환원 정책 등을 통해 투기 자본 공격의 빌미를 없애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실장은 "평소 배당 정책 등 확실한 우군을 만들어두는 것이 단기적으로 유일한 대책"이라며 "헤지펀드들도 우군이 많다는 것을 알면 쉽게 공격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명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장은 "엘리엇 같은 헤지펀드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은 지배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며 "투명한 지배 구조를 통해 헤지펀드가 공격할 여지를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