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하면 가상 화폐 드릴게" 순식간에 1조원 가량 모아... ICO 위험한 유혹

    입력 : 2018.03.08 09:37

    ["개미 투자자들 사기당할 위험" 美당국 기업 80여 곳에 소환장]


    - 계획만 보여주고 나몰라라?
    ICO 기업 5%만 실제 사업 진행
    기업 투명 공개하는 IPO와 달리 사업계획서 하나만 달랑 내세워


    - 페북은 7년, 우버는 5년 걸렸는데…
    텔레그램 2주만에 9000억원 모아… 한국은 금지… 기업들 스위스로
    작년 가상화폐 발행 업체 46% 파산


    전 세계 IT(정보기술)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들이 가상 화폐 발행에 앞다퉈 뛰어드는 데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미국 SEC(증권거래위원회)는 최근 가상 화폐 관련 업체 80여 곳에 소환장과 정보공개 요구서를 발송했다. SEC는 가상 화폐를 발행해 투자금을 끌어모은 기업 상당수가 실제 사업은 하지 않거나 투자자 모집 과정에서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SEC가 가상 화폐 사기 사냥에 나섰다"면서 "가상 화폐 사기로 개미 투자자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 CNBC도 "이번 조사를 계기로 그동안 별다른 규제가 없었던 가상 화폐 발행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가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ICO 열풍… 한 번에 9000억원도 모아


    작년 하반기부터 전 세계적으로 가상 화폐 발행(ICO·Initial coin offering) 열풍이 일고 있다.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고 단숨에 투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용이성 때문에 기업들이 주식을 나눠주는 IPO(기업 공개·Initial public offering)보다는 ICO를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해진 것이다. ICO를 통해 기업들이 조달한 자금은 지난해 약 52억달러(약 5조5600억원)로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IPO를 통한 투자금 373억달러(약 39조8600억원)의 7분의 1 수준이다. 올해엔 지난 2개월 동안에만 ICO에 31억달러(약 3조3000억원)가 몰리며 사상 최대 호황을 맞고 있다. 대표적으로 모바일 메신저 업체인 텔레그램은 지난 1월 '그람스(grams)'라는 가상 화폐를 발행해 2주만에 8억5000만달러(약 900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그래픽=김충민


    일반 기업이 증시에서 이런 투자를 받으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텔레그램은 132 페이지의 백서(사업 계획서)를 내는 것으로 1조원에 가까운 돈을 확보했다. 뉴욕타임스는 "페이스북이 이 정도 자금을 투자받는 데 7년, 우버는 5년이 걸렸다"며 "지난해 별다른 투자를 받지 못했던 회사가 가상 화폐 발행으로 순식간에 거금을 끌어모았다"고 했다.


    한국 기업들도 가상 화폐 발행 열풍에 동참하고 있다. 한국은 ICO가 금지돼 있기 때문에 기업들은 해외 법인을 통해 가상 화폐를 발행한다. IT 기업인 현대BS&C는 스위스에 블록체인 관련 법인을 설립하고 가상 화폐 '에이치닥(HDA C)'을 발행해 2억5800만달러(약 2800억원)를 모았다. 인터넷기업 카카오도 5일 블록체인 자회사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카카오 코인'과 같은 이름의 가상 화폐를 해외에서 발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국내 스타트업들도 ICO가 합법인 스위스, 영국 등으로 건너가 ICO를 추진하고 있다. 한 가상 화폐 업계 관계자는 "스타트업들도 해외에서 ICO에 성공하면 수백억원은 쉽게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 "투자자 보호 대책 미흡" 지적도


    가상 화폐 발행에는 사실상 규제가 없다. 주식시장에 상장되는 IPO는 기업의 업력과 재무구조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평가받는다. 이 과정을 금융회사들이 보증하고, 거래소가 서류를 철저하게 검토한다.



    하지만 ICO는 가상 화폐 발행 목적과 어떤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적은 ‘백서’만으로 수익성과 성장 가능성을 평가받는다. ICO는 신규 코인 발행 기업이 홈페이지에 공지와 백서를 띄우고, 가상 화폐를 입금받을 계좌를 올리면 그걸로 끝이다. 기업이 조달 자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공개할 의무도 없다.


    문제는 ICO가 사업 계획만 보고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에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글로벌회계법인 언스트앤드영(EY)은 최근 “372개 ICO 업체들의 백서를 분석한 결과, 백서에 담긴 사업을 실제로 진행하고 있는 업체는 5%에 불과했고, 84%는 순수한 아이디어 단계”라며 “일부 백서에는 기술적으로 구현이 안 되는 코딩(프로그램) 오류까지 있었다”고 밝혔다. 가상 화폐 평가업체 토큰데이터도 지난달 “지난해 가상 화폐 발행 업체의 46%(418개)가 이미 파산했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대박을 노리는 투자자들의 심리를 이용해 그럴싸한 계획만 내놓은 뒤 일단 돈을 벌고 나면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해외에서도 ICO 발행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ICO가 허용된 일본이나 싱가포르·이스라엘 등도 ICO를 감독할 기관과 법률을 준비 중이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ICO의 위험성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자 일본 정부도 ICO 과정을 감시하고 규제할 수 있는 관련 법규 검토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ICO(Initial Coin Offering·가상 화폐 공개)


    기업이 백서(사업 계획서)를 공개하고 신규 가상 화폐를 발행해 투자자에게 판매하는 방식으로 사업 자금을 모집하는 것. 기업은 현금 대신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가상 화폐를 받고 투자자에게 신규 가상 화폐를 지급한다. 신규 가상 화폐가 거래소에 상장이 되면 투자자들은 수익을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