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實名확인 '깐깐'... 주부·대학생 투자 어려워져

    입력 : 2018.01.31 09:47

    소득 증빙 없는 주부·대학생 하루 30만원으로 입출금 제한


    은행, 절차 까다로워 시간지연 일쑤… "정부가 허들을 잔뜩 세워" 불만
    거래소 시스템 느려져 혼란 빚기도
    일부 소형거래소 '영업 중단' 선언


    가상 화폐 '리플' 투자자인 황모(32)씨는 30일 오전 9시 30분 자신이 평소 거래하던 가상 화폐 거래소 업비트에 접속해 실명을 확인받는 절차를 밟으려고 했다. 이날 '가상 화폐 거래 실명제'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명 확인 절차를 밟으려는 투자자가 몰리면서 업무처리가 지연됐다. 황씨는 "오전 중에 거래소 사이트엔 '먼저 신청된 계좌 인증을 처리 중'이란 메시지만 계속 떴다"고 했다. 황씨는 오후에야 겨우 실명 확인을 했다. 황씨는 "예전엔 아무 은행에서나 거래소에 투자금을 넣을 수 있었는데, 이젠 거래소가 거래하는 IBK기업은행에 내 계좌가 있어야만 입금이 된다"고 했다.


    가상 화폐 거래 실명제가 시작된 30일 오후 서울 중구 NH농협은행 본점에 "가상 화폐 거래는 금융 거래 목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가상 화폐 거래 실명제가 시작된 30일 가상 화폐 투자자들이 입출금 계좌에 대한 실명 확인을 받기 위해 일시에 몰리면서 일부 거래소의 시스템 속도가 느려지는 등 혼선을 빚었다. 은행들이 실명 확인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은 일부 소형 거래소는 앞으로 영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예고했다. 가상 화폐 거래에서 이런 위험들이 새로 노출되면서 가상 화폐 거래가 다소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가상화폐 투자자, 실명 확인해야 입출금


    지금까지 국내 가상 화폐 거래소는 가상계좌를 이용해 투자금을 입출금할 수 있게 해 왔다. 가상계좌는 은행이 발급하는 게 아니라 거래소가 이용자들에게 배분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은행이 실명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돈은 A란 사람이 넣고 출금은 B란 사람이 해도 은행은 누구인지 알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구조 탓에 가상 화폐가 검은 자금 세탁 등에 쉽게 악용된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금융당국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가상 화폐 거래 실명제'를 30일부터 실시하기로 했다. 은행이 실명 확인을 한 계좌를 통해서만 가상 화폐 거래소에 입출금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가상 화폐 거래소 업비트의 경우 거래은행인 IBK은행 계좌가 있어야만 투자자들이 입출금이 가능하다. 또 빗썸은 NH농협은행, 신한은행 계좌를 가진 투자자만 거래할 수 있다. 은행이 투자자의 실명을 확인하기 때문에 투자자별로 입출금 내용을 사후에 검증할 수 있다.


    만약 가상 화폐 거래소가 거래하는 은행에 계좌가 없는 투자자들은 새로 은행에 가서 실명 확인을 하고 계좌를 터야 한다. 직장인같이 월급 명세서를 낼 수 있으면 비교적 쉽게 계좌를 열 수 있지만, 주부, 대학생 등 소득 증빙이 없는 경우엔 전자 금융 이체가 하루 30만원 등으로 입출금이 제한되는 계좌밖에 못 만든다. 이런 경우 사실상 가상 화폐 거래가 어려워진다. NH농협은행은 이날 "가상 통화 거래는 금융 거래 목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안내문을 게시했다. 가상 화폐 거래만을 위한 계좌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셈이다. '가상 화폐 거래는 허용하되 투명하고 까다롭게 만든다'는 정부 입장을 반영한 액션이다. 하지만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허들을 잔뜩 세워놨다'는 불만이 나왔다.


    한편 업비트, 빗썸 등 대부분 거래소가 당분간 기존 투자자만 입출금하게 했지만, NH농협은행과 거래하는 코인원이 신규 투자자도 실명 확인 계좌를 열고 입금도 할 수 있다고 해서 거래소 간 형평이 맞지 않는다는 말도 나왔다.


    ◇일부 소형 거래소 "문 닫을 수 있다"


    가상 화폐 거래 실명제가 실시되면 실명 확인을 받은 투자자들이 신규 자금을 넣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계좌 개설이 까다로워지면 신규 자금 유입을 기대하기 어려워질 것이란 의구심이 확산되면서 투자자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이런 투자 심리가 반영된 여파로 이날 오후 11시 비트코인은 전날보다 4.6% 떨어진 1220만원대에 거래됐다. 시세가 1비트코인당 2500만원을 돌파했던 연초의 절반에 머물렀다.


    이날 소형 거래소 코인피아는 원화와 가상 화폐 사이에 거래를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다음 달 6일 자정부터 모든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중소형 거래소는 은행이 실명 확인 서비스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거래소 10여 개가 은행의 실명 확인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만큼 앞으로 중소 거래소들이 잇따라 거래 중단을 선언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가상 화폐 거래자에 대해 실명 확인 의무만 부여해도 거래가 상당히 위축될 수 있다는 효과를 확인한 셈이다. 정부는 앞으로 규제 강도를 높일 것이란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전자상거래법상 신고만 하면 검토 없이 (가상화폐 거래소 설립 신고를) 접수하게 돼 있다"며 "공정위가 통신판매업자로 법적 지위를 인정해 준 것처럼 오인되고 있는데, 통신판매업자 신고가 적정한지, 의무는 이행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