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중앙은행, 현금 대체할 '가상화폐' 열공... 韓銀도 TF 가동

    입력 : 2018.01.22 09:12

    [디지털 법정화폐 연구 한창]


    비트코인 등 민간 가상화폐처럼 블록체인 기술 이용하지만
    지폐·동전 같이 액면가격 정해져 현찰·신용카드 없어도 결제 가능


    실물화폐 발행할 필요 없어지고 거래비용·세율 낮아져 GDP 증가
    민간은행들은 존폐 기로에 서


    비트코인 등 가상 화폐 가격이 올 들어 급등과 반등을 거듭하는 가운데, 각국 중앙은행들이 중앙은행 가상 화폐(CB 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연구에 돌입하고 있다. 한국은행도 최근 금융결제국과 금융안정국, 통화정책국, 금융시장국 등 8개 관련 부서가 참여한 '가상 통화 및 CBDC 공동연구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첫 회의를 열었다.


    CBDC는 디지털 형태를 갖고, 법정화폐 단위를 사용하며,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를 뜻한다. 디지털 형태를 갖고, 블록체인 같은 보안 기술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비트코인 같은 민간 가상 화폐(PIDC·Privately Issued Digital Currency)와 비슷하다. 하지만 CBDC는 지폐나 동전처럼 액면가격이 정해져 있고, 법정통화로서의 효력이 있다. 발행 주체가 민간이고, 시장가격 변동성이 매우 높은 비트코인 등 민간 가상 화폐와 갈리는 대목이다. 왜 보수적인 중앙은행이 가상 화폐에 관심을 가질까.


    ◇2014년 마이너스 금리 도입되자 논의 시작


    CBDC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건 2014년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계속되면서 2014년 이후 유럽중앙은행(ECB) 등 일부 중앙은행들이 마이너스 금리정책을 채택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마이너스 금리정책을 효과적이고 편리하게 구현할 수 있는 대안으로 블록체인(분산원장기술)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블록체인(blockchain)' 기술은 특정 데이터를 네트워크에 연결된 모든 사용자 컴퓨터에 분산 저장해 사실상 해킹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보안 기술이다. 이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CBDC 계좌를 발행하고 현금을 없애면, 마이너스 금리정책이 도입될 경우 은행에 돈을 맡겨둘수록 손해인 만큼 예금을 찾아 쓸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현찰을 인출해서 집에 숨겨 놓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셈이다. 로고프(Rogoff)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2016년 저서 '화폐의 종말'을 통해 "범죄 ·부패·지하경제를 막기 위해 50달러 이상의 고액권 발행을 중단하고 이를 '벤코인(BenCoin)'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벤코인은 100달러 지폐에 도안된 벤저민 프랭클린과 비트코인의 조어(造語)이다.


    하지만 이 같은 논의는 2015년 12월 미국 연준(Fed)의 금리 인상을 계기로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쓸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퇴조하기 시작했다. 대신 각 중앙은행은 블록체인 기술과 금융과의 접목, 현금 사용 저하 등 현실적인 이유에서 CBDC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다.


    ◇스웨덴이 가장 적극적으로 CBDC 논의, 미국은 회의적


    전 세계에서 CBDC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스웨덴이다. 지난 2016년 이미 CBDC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e-Krona(이크로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인구 감소 등으로 지난 30년간 지속적으로 화폐 발행 잔액이 감소한 데다, 디지털화(化)로 현금 이용 빈도가 빠르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스웨덴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현금 유통 잔액 비율은 1.7%로 미국(7.9%)이나 한국(5.5%)보다 크게 낮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스웨덴은 1668년 세계 최초로 중앙은행을 설립해 불태환지폐를 발행한 것에 대한 국가적 자부심도 높다"고 덧붙였다. 스웨덴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도 CBDC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금융 허브 지위를 위협받고 있는 영국도 CBDC에 일찍이 관심을 보였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2015년 CBDC 발행을 주요 리서치 과제로 선정한 이후 지속적으로 관련 연구 결과를 발표 중이다. 또 민간 컨소시엄과도 협력을 통한 CBDC 발행 가능성을 비공식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한국·캐나다·독일·네덜란드·싱가포르·일본 중앙은행과 ECB 등이 지난 2016~2017년부터 지급 결제 시스템에 분산원장기술을 적용하는 실험을 시작한 상황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아직은 CBDC가 법적·기술적으로 가능할지 연구하는 단계"라며 "단, 블록체인 기술이 도입되면 원장을 여러 개 만들 수 있는 만큼, 북한 EMP(핵 전자기파) 공격 등에도 안전하게 금융 기록을 보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단, 기존 달러화 중심의 국제 금융 질서를 선호하는 미국은 CBDC에 가장 회의적이라는 평이다.


    ◇CBDC 도입되면 민간은행 역할 크게 위축


    CBDC가 도입되면 화폐 발행 비용이 크게 줄고, 결제와 저장이 편리해진다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국민 개개인이 CBDC 계정을 가지고 있고 이를 스마트폰 등에 입력해서 다닌다면 굳이 신용카드나 체크카드 등이 없어도 결제할 수 있다. 조폐공사에서 지폐와 동전을 발행할 필요도 없다. 영국 중앙은행은 2016년 연구 보고서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전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30%만큼 CBDC가 발행됐다고 가정할 경우, CBDC가 도입되면 거래 비용, 실효세율 등이 낮아지면서 GDP가 3% 정도 늘어난다"며 "또 CBDC가 경기를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CBDC 본격 도입은 '민간은행의 종말'로 귀결될 수도 있다. 중앙은행이 '은행의 은행'이 아닌, '모든 경제 주체의 은행'이 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는 중앙은행이 발권·통화 조절·지급 결제뿐 아니라 예금 수신·대출 등 민간 은행의 임무도 하는 사회주의식 '단일은행(monobank)'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연구원은 지난달 '중앙은행의 디지털 화폐 발행에 대한 최근 논의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CBDC 발행·사용은 가상 화폐의 장점과 가치 안전성까지 제공하기 때문에 은행 예금뿐 아니라 은행 존립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민간은행 예금을 중앙은행 CBDC로 쉽게 전환할 수 있게 되면, 소비자가 중앙은행으로 몰리면서 민간은행 예금 인출(뱅크런)이 지속되고, 이에 따라 상업은행이 대출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는 등 은행업 자체가 쪼그라들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중앙은행과 국민 개인 간 직접 금융 거래가 가능해지면 입출금 통장 등 단기 금융 상품을 중앙은행이 흡수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렇게 되면 민간은행은 보험사처럼 장기 상품만 취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CBDC가 법정화폐로서 모든 거래에 자유롭게 이용되려면 결제 시스템이 24시간 운영되어야 하는 만큼, 해커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 관계자는 "CBDC 논의는 아직 시작 단계인 만큼, 조만간 CBDC가 발행될 가능성은 낮다"며 "또 발행되더라도 은행 간 거래 및 중앙은행 간 거래에 특화된 지급 수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