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에 오락가락... 탄소배출권 값 급등락, 기업들 대혼란

    입력 : 2017.12.18 09:30

    [에너지 정책 틀 바뀌면서 국내 시장 불확실성 커져]


    기업마다 정해진 탄소 배출량 남는 건 팔고, 모자라면 사야
    물량 확보 못하면 3배 과징금


    정부가 6월까지 발표했어야 할 3년 할당량 아직도 안나와
    시장에 나오는 배출권 품귀 현상


    제품 생산 과정에 온실가스를 많이 내보내는 발전·철강·시멘트 업계가 큰 혼란에 빠졌다. 1년 내내 t당 2만원 안팎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탄소배출권' 가격이 최근 40%가량 급등, 2만8000원까지 치솟으면서 경영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난 6월까지 내놓아야 할 탄소배출권 거래제 계획 발표를 미루면서 정책 불확실성이 커지자 기업이 시장에 배출권을 내놓지 않은 탓이다. 근본적으로 배출권 거래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해 작은 물량 변화에도 시장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내년도 탄소배출권 할당량을 맞추려면 기업도 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설비투자를 해야 하는데 정부가 계획을 내놓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불만이다. 정부는 연말까지 내년 탄소배출권 할당 계획을 내놓은 뒤 내년 6월쯤 최종 확정한다는 계획이어서 산업계 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에 연간 탄소배출권 할당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시장 기능을 활용해 국제사회에 약속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도입됐다. 온실가스를 많이 내보내는 기업에 연간 배출 가능한 탄소량을 정해주고, 기업은 그 범위 내에서만 탄소를 배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를 초과하면 배출권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사야 한다. 가령 A 기업이 정부로부터 연간 1만t의 탄소배출권을 할당받았고, 한 해 방출한 온실가스가 8000t이라면 2000t의 여유분이 생긴다. 기업은 이를 시장에 팔아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반대로 1만t을 할당받은 기업이 1만2000t의 온실가스를 배출했다면 2000t의 배출권을 시장에서 사들여야 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선 탄소 배출량을 줄이거나 추가 비용 지출을 감내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지구온난화 주범인 온실가스 감축에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기존 전망치보다 37% 감축을 목표로 2015년부터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시행하고 있다. 사진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중국의 한 화력발전소 모습. /조선일보 DB


    우리나라는 2015년부터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시행했다. 정부는 1차(2015~2017년), 2차(2018~2020년) 계획 기간에는 3년마다, 이후엔 5년마다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올해 끝나는 1차 계획 기간 때 탄소배출권 적용 기업은 2011~2013년 온실가스 배출량이 연평균 12만5000t 이상인 업체 또는 2만5000t 이상인 524개 업체로, 총 5억3900만t의 탄소배출권이 할당됐다. 온실가스를 많이 내뿜는 발전·철강·시멘트 업종에 주로 할당됐다. 기업의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배출권은 100% 무상으로 할당했다. 하지만 내년 시작되는 2차 계획 기간 때는 97%, 2021년 시작되는 3차 때는 90% 정도 무상 할당되고, 제도가 안착되면 무상 할당 비율을 줄여나갈 계획이다. 그만큼 기업의 비용 부담이 커지게 되는 셈이다.


    기업은 배출권이 부족하면 다음해 배출권 일부를 미리 당겨 사용할 수 있다. 또 배출권을 모두 사용하지 못하면 거래소에 팔아도 되고, 다음해로 넘겨도 된다. 개발도상국에 온실가스 감축사업(CDM·청정개발체제)을 하면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인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첫 시행 해인 2015년 대상 기업 524곳 중 239곳이 배출권 할당량이 부족해 시장에서 구매하는 방식으로 해소해야 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37% 감축 목표


    국제사회는 2015년 12월 새로운 기후체제 합의문인 파리협정을 채택했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대략 1850년 전후) 이전과 대비해 1.5℃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IPCC(기후변동에 관한 정부 패널) 보고서를 보면 지구 평균기온이 2℃ 상승하면 10억~20억명이 물 부족을 겪고, 생물종 20~30%가 멸종하고 수십만 명이 폭염으로 사망할 것으로 예측됐다. 파리협정은 EU(유럽연합)·중국·인도 등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국가들이 비준하면서 2016년 11월 4일 공식 발효됐다.


    파리협정은 선진국·개도국 할 것 없이 모든 당사국이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제출하도록 했다.


    중국·미국·인도·러시아·일본·독일에 이어 세계 7위 온실가스 배출국인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온실가스 배출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전망치보다 37% 줄이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2030년 8억5060만t 온실가스 배출이 예상되지만 이를 5억3600만t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배출권 거래 부족 탓에 가격 급등락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1월 23일 탄소배출권 거래 가격은 연중 최고치인 t당 2만8000원을 기록했다. 2015년 탄소배출권 거래 시장이 열린 뒤 t당 1만원 정도인 것과 비교하면 3배 가까이 오른 것이다. 12월 들어서도 t당 2만원 초중반을 오르내리고 있다.


    최근 배출권 가격이 급등한 것은 시장 불확실성 탓이다. 정부는 법률이 정한 대로 지난 6월 2차 계획 기간(2018~2020년) 탄소배출권 할당량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 노후 원전 수명 연장 금지 등 탈(脫)원전으로 에너지 정책의 틀을 바꾸면서 문제가 됐다. 전력수급계획을 다시 짜고, 기존 온실가스 감축 로드맵도 모두 바꿔야 하기 때문에 탄소배출권 할당 계획 발표도 함께 늦어진 것이다. 발전업계 관계자는 "정부는 이달까지 잠정적으로 탄소배출권 할당량을 배정하고 내년에 정확한 할당량을 확정하겠다고 하지만 연간 수십억원을 배출권 구매에 쓰는 기업들은 내년 사업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 발전·화학·시멘트 업종 등 21개 기업은 "탄소배출권 수요가 급증하지만, 배출권이 남는 기업들은 시장에 내놓기를 꺼리면서 수급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다"면서 "시장 상황을 개선해달라"는 건의문을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지금과 같은 비싼 배출권 가격이 유지되면 기업 순익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배출권이 부족한 기업이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시장 가격 3배에 달하는 과징금까지 내야 할 처지"라고 우려했다. 특히 내년부터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100% 무상으로 받던 배출권 일부(3%)를 기업이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기업의 비용 부담은 한층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산업계에선 탄소배출권 구매에 매년 4조5000억원가량 추가부담이 생길 것으로 전망한다. 업계 관계자는 "탄소배출권 거래제 시행이 3년 됐지만, 거래가 활성화되지 않다 보니 적은 물량에도 가격이 급등락하는 일이 벌어진다"며 "탄소배출권 거래 시장 활성화를 위한 근본적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기업만 힘들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탄소배출권 거래제


    정부가 매년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기업의 탄소배출 총량을 정한 뒤 배출권을 할당해주고, 배출권이 모자라는 기업은 남는 기업에 비용을 지불하고 사서 쓰도록 하는 제도다. 기업은 남거나 모자란 배출권을 한국거래소의 배출권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다. 온실가스를 많이 내는 기업에 비용을 부담하게 해 국가 전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