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硏 '정규직 전환' 첫 삽도 못 떴다

    입력 : 2017.12.05 09:23

    [정부 비정규직 가이드라인 한 달… 대부분 勞使 갈등으로 난관 봉착]


    25곳 중 5곳만 심의委서 논의… 그나마 열린 회의도 '상견례'
    연구노조 "노사 同數로" 요구… 출연硏 "가이드라인에 없는 사항"
    6곳은 심의委 구성조차 못 해… 정규직 전환 일정 늦춰질 우려


    정부 출연연구기관(출연연) 소속 비정규직들의 정규직 전환이 난관에 봉착했다. 연말까지 정규직 전환 계획을 수립해야 하지만 대부분 출연연이 노사(勞使) 갈등으로 정규직 전환 논의를 위한 심의위원회 회의를 열지 못하고 있거나 일부는 논의 기구마저 꾸리지 못하는 등 파행을 겪고 있다. 지난 10월 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지 한 달이 넘도록 첫 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본지가 지난달 30일 출연연 25곳을 조사한 결과, 심의위에서 정규직 전환 관련 논의를 시작한 기관은 전자통신연구원과 식품연구원, 기계연구원, 재료연구소, 녹색기술센터 등 5곳뿐이었다. 이들 5곳도 노사 심의위원 간 상견례만 했을 뿐 정규직 전환 안건을 본격적으로 다룬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정규직 전환 심의위를 구성하지 못한 기관도 6곳이나 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심의위는 출연연별로 기간제 연구직 3737명(전체 연구 인력의 23.4%)에 대한 정규직 전환 대상과 규모를 결정하는 기구다. 각 출연연은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자체 심의위에서 구체적인 전환 계획을 세워 오는 31일까지 과기정통부에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예정보다 심의위 구성이 늦어지면서 내년 3월까지 정규직 전환을 완료한다는 계획이 틀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노사 동수(同數)로" vs. "정부 가이드라인에 없는 사항"


    출연연들의 정규직 전환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은 심의위 구성을 둘러싸고 노조와 기관이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출연연 내 최대 노조 단체인 전국공공연구노조는 과기정통부의 가이드라인 발표 직후 출연연에 심의위를 노사 동수로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일부 출연연 기관장들이 최근 "일괄적인 정규직 전환보다 공개경쟁으로 가야 한다"는 뜻을 밝히자 정규직 전환 규모가 줄어들 것을 우려해 심의위 내 노조 비중을 높이려는 것이다. 신명호 공공연구노조 정책위원장은 "출연연은 연구직, 기능직, 기술직, 행정직 등 근무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노사가 함께 들어가 정규직 전환 대상자의 범위를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25곳의 정부 출연연구기관이 노사 간 갈등으로 정부 가이드라인이 나온 지 한 달이 넘도록 정규직 전환 논의를 시작하지 못했거나, 일부 기관은 논의 기구도 구성하지 못하는 등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다. 사진은 한 정부 출연연 연구원이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는 모습. /김영근 기자


    반면 출연연 측은 정부 가이드라인에 심의위가 노사 동수여야 한다는 내용이 없는 데다 공공연구노조가 출연연 연구원들을 대표하는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노조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과기정통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심의위는 6~10명으로 구성하되, 내부 인사와 외부 전문가가 절반씩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출연연의 한 임원은 "정규직 전환이 임금 단체교섭도 아닌데 심의위를 노사 5대5로 구성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노사 간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감정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일부 출연연에서는 최근 심의위 구성을 두고 노사 간 욕설과 고성이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의 한 출연연 공공연구노조 지부에서는 지난달 비정규직 연구원 100여 명을 대상으로 사전 가입 신청서를 받기도 했다. 심의위 구성을 앞두고 노조의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조 가입 대상이 아닌 비정규직 직원들까지 모으는 것이다.


    ◇정규직 전환 늦어질 우려


    정규직 전환 절차가 차질을 빚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연구 현장에 맞지 않는 정규직 전환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바람에 나타나는 예견된 갈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비정규직 연구원들에 대한 능력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고 일괄 정규직 전환할 경우 출연연의 연구 경쟁력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향후 신규 인력 채용에도 막대한 지장을 줄 수밖에 없어 출연연이 선뜻 추진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국회 오세정 의원(국민의당)이 최근 출연연의 박사급 과제책임자 99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서도 일괄 정규직 전환에 반대한 응답자가 87%, 공개경쟁 방식의 채용을 원하는 책임자가 64%인 것으로 나타났다. 오 의원은 "정규직 전환도 중요하지만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연구 환경 조성 등이 먼저 해결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고 말했다.


    정규직 전환에 따른 재원 마련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출연연 비정규직은 연구직에 시설관리·청소 등 파견직 인력까지 합하면 전체 1만8734명의 34.6%인 6484명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정규직으로 전환될 경우 임금 격차를 단순 계산하면 1000억원 가까운 돈이 더 든다. 과기정통부는 재원 마련에 대해 기획재정부와 협의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