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과로하면 병이 난다, 감정 노동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평생건강증진센터 허휴정 교수

    입력 : 2017.10.20 17:31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평생건강증진센터 건강증진의학과 허휴정 교수(정신건강의학과)

    은행 콜 센터 직원인 A씨는 일요일 밤마다 잠을 이루기가 힘이 든다. 월요일이 되어 출근하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늘 전화 선 너머 매 시간 불만을 들어야 하고, 때로는 반말, 욕설을 듣고도 참아야 하는 때가 많다. 며칠 전에는 서비스가 불충분 하니, 상급자를 바꾸라고 소동을 피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기껏 전화나 받는 일을 하는 주제에 무슨 말대꾸야! 더 말하기 싫으니 지점장 바꾸라" 며 폭언을 퍼부었고, A씨는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당혹스러움과 분노가 뒤엉킨 마음이 들지만, 제대로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또 다른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A씨는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리는 증상이 생겨났다. 때로 밤새도록 전화 선 너머 폭언에 시달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일을 그만두고 싶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생각하면 쉽사리 관두기도 어려워 오랜 고민 끝에 지인의 권유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감정노동이란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는 무관하게 직무를 행해야 하는 감정적 노동을 말하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일을 수반한다. 감정노동자에는 은행원·승무원·전화상담원처럼 직접 고객을 응대하면서 자신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서비스해야 하는 직업 종사자들이 해당된다.


    과도한 감정노동은 우울증, 불안장애, 자살과 같은 정신건강과 관련된 문제뿐만 아니라, 만성적 스트레스로 인한 근골격계 통증, 생리불순과 같은 부인과적 문제 등 신체건강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감정노동은 자본주의 시대의 부산물이다. 따라서, 감정노동을 대하는 사회구성원의 시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결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소비자는 왕이다"라는 모토는 감정노동자들을 은연 중에 노예 혹은 하인으로 보는 전근대적인 시선이 숨겨져 있다.


    감정노동자들도 소비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격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 시민사회의 동등한 일원이며, 그 누구에게도 단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상처 줄 권리는 없다. 당신이 들른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판매원이 당신의 딸이거나 아들이었다면,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폭언을 할 수 있겠는가


    일터 내에서의 문화 또한 중요하다. A씨의 상사는 말도 안 되는 요구로 소동을 피운 고객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하였다. 이런 상사의 태도는 A씨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다. 아무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고, 이 모든 상황을 그저 마음이 약한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수없이 쏟아지는 인신공격적 폭언은 지금 하고 일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제도적 차원에서의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한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노동자에게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고, 밝은 미소를 지어야 하는 일은 마음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정신적 노동이 분명하며, 휴식 없는 장기간의 노동은 병을 만들 수 있다. 때로는 휴식으로도 회복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은 A씨는 치료를 시작하고 난 뒤, 다행히 안정을 되찾았다. 약물 복용을 하기 시작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증상이 호전되었고,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손발이 떨리는 증상도 사라졌다. 점차 안정이 되면서, 상담을 통해 그 동안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여유도 생기게 되었다.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불만들 중에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해결할 수 없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A씨를 향해 못되게 구는 고객이 있었지만, 그들이 표현하는 분노가 A씨를 향한 것이 아니라, 회사나 시스템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면서 예전보다는 훨씬 덜 동요하게 되었다.


    A씨와 같이 스스로 정신건강의학과에 도움을 청하는 사례는 흔하지 않다. 사실 A씨의 고통은 A씨의 나약함이 아니라 상당부분 사회와 기업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터에서 일을 하다가 발생한 심리적 후유증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돌린 채, 그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고, 견디라고만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큰 문제이다. 감정노동자들의 정신건강 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적, 제도적 차원의 지원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상황은 그릇된 사회적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정신과 치료에 대한 편견도 병원을 찾기를 꺼려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이다.


    얼마 전 콜센터 아르바이트를 하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한 어느 여고생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감정노동자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사회와 기업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 심각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기도 한다.


    감정노동자들이 불필요한 심리적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방책의 마련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 깊은 상처를 입은 감정노동자의 치유를 위해서는 이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통한 점검 및 치료가 필요하다.


    아울러 감정 "노동"으로 인한 심리적 후유증의 관리는 감정노동자 개인이 아닌 국가와 기업의 의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수준 높은 국가와 기업이라면, 감정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조금 더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