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자 드림아이에듀 대표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놀자!"

  • Editor 이민희

    입력 : 2017.10.18 17:39

    일단 먼저 이 기사를 작성하기 전, 유학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유학을 가는 것은 선택이다. 유학을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도피유학이라는 말도 종종 나오긴 하지만. 그렇지만 대부분 넓은 시야를 갖고 활동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유학을 떠난다. 여기 유학을 통해 넓은 세상에 발을 내딛게 된 청년들을 소개한다. 두 청년은 '엄마의 마음으로' 라는 슬로건을 내걸은 유학컨설팅회사 드림아이에듀를 통해 유학길에 올랐다.


    "가장 큰 변화는 자립심과 독립심"


    #이동건



    "우리나라 학생들은 눈치가 보여서 질문도 잘 못하잖아요. 근데 심지어 캐나다 학교의 선생님은 제지도 안하고 하나하나 답을 해줬어요. 그 문화가 충격이었어요. 심지어 제가 수업내용을 이해 못하면 퇴근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이해가 될 때까지 저와 같이 있어 줬어요."


    첫 인터뷰 대상은 항공사에 재직 중인 이동건씨였다. 그는 드림아이에듀를 스스로 찾아온 1호 학생이다. 그는 2001년에 캐나다로 유학생활을 다녀왔다. 그 당시 드림아이에듀는 작은 기업이었다. 그는 어떤 점 때문에 드림아이에듀에 끌린 걸까. 그가 유학을 결심하던 2001년에는 유학 열풍이 불던 때였다. 좀 더 큰 유학컨설팅기업을 원하지 않았을까.


    "민은자 대표님의 프로필과 쓴 글을 보고 저도 모르게 찾아갔어요. 여기다 싶었거든요."


    그는 자기 스스로도 어떤 것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좋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유학을 결심했을 때 당시 다니던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 반대를 했다. 하지만 그는 유학을 가면 시야가 넓어질 것 같았고 영어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유학을 가기엔 늦은 나이였다. 처음 유학을 가던 때가 16~17살이었으니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반대도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비용이 들기도 했지만 아마도 담임선생님의 극심한 반대가 이유였던 듯하다. 그는 유학을 가기 위해 단식투쟁도 했었다고 하며 웃었다.


    "꽤 늦은 시기였죠. 지금 생각하면 하지 말았어야 하는 행동인데. 하지만 그렇게 안 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에요(웃음)."


    그는 캐나다의 학교 교육시스템이 우리나라와는 너무 달라 애를 먹었다. 토론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에 도무지 적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발표를 적극적으로 하는 학생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은 달랐다. 20명이 넘는 학생들이 서로 손을 들며 발표를 하려고 경쟁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눈치가 보여서 질문도 잘 못하잖아요. 근데 심지어 캐나다 학교의 선생님은 제지도 안하고 하나하나 답을 해줬어요. 그 문화가 충격이었어요. 심지어 제가 수업내용을 이해 못하면 퇴근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이해가 될 때까지 저와 같이 있어 줬어요."


    그가 유학을 다녀온 후 가장 큰 변화는 자립심과 독립심이었다. 캐나다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갑작스레 어려워진 가정형편 때문에 국내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그 당시 혼자 자신의 인생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만약 유학을 가기 전의 저였다면 부모님에게 의지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게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유학을 했던 경험인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큰 수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는 드림아이에듀 민은자 대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민 대표가 사업적으로만 학생들을 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눈 앞의 이익보다 학생들의 미래를 진정으로 함께 고민하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민 대표라고 답했다.


    "만약 A학교와 B학교가 있어요. A학교에 학생을 보내면 훨씬 이익이 남지만 그 학생의 커리어를 보면 B학교가 나을 때가 있죠. 그럼 민은자 대표님은 고민 없이 B학교로 보내셨어요. 엄마처럼 챙겨주시는 것이 드림아이에듀만의 차별성이 아닐까 해요."


    그는 힘들 때마다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도 민 대표라는 말을 했다. 그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캐나다의 대학에 다시 돌아가지 못할 때 손을 내민 사람이 민 대표였다. 민 대표는 기꺼이 그의 교육을 위해 1년치 학비를 준 것이다.


    "솔직히 혈연이 아니었잖아요. 저는 그저 민 대표님의 고객일 뿐이었는데, 대표님이 도움을 주셔서 캐나다로 대학을 다녀왔어요. 이런 얘기 해도 되나요(웃음)."


    그는 연신 민 대표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오히려 자신이 이런 얘기를 언급하면 민 대표에게 어려움이 생길까 걱정하는 모습도 보였다. 민 대표는 그가 어려움을 겪고 고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항상 했던 말이 있었다. "너는 뭐든지 될 수 있어. 지금 포기하지 말자. 내가 옆에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입시문화에 대해 말을 꺼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무조건 대학을 진학해야 하는 현실에 그는 안타까워했다. 그는 학생들이 원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지원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청년이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만약 유학을 생각하고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확실히 국내의 입시문화에만 치중돼 있는 친구들과는 사고방식이 달라지는 것을 느껴요. 우리나라 학생들은 너무 조급해요."


    그는 유학을 다녀온 후로 자신의 삶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작 부모님은 잘 모르시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웃기도 했다.


    "유학은 행복한 휴식이었다"


    # 이든 김안



    "한국에서는 골고루 다 잘해야 하잖아요. 어떤 과목의 성적이 부족하면 그 성적을 올리라고 압박을 주죠. 미국은 달랐어요. 잘하는 과목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해줘요. 그 분야의 영재로 키우는 거죠."


    그의 이름은 '이든 김안'이다. 한국이름은 김권철. 부모의 성을 합쳐 그의 성은 김안이다. 그는 현재 호주의 법무법인에서 사업개발실장을 맡고 있다. 최고전략실장인 CSO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곳은 그의 첫 직장이 아니다. 첫 직장은 호주 테마파크의 매표소 직원이었다. 그는 미국과 호주 유학생 출신이다.


    "호주는 유학생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잘 되어 있어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대부분 외식업에서 일하는 것이 시작이거든요. 한국 유학생들에게 취업 강연을 해주기도 했어요."


    그는 1년 과정으로 호주행 비행기를 탔다. 친구들의 영향으로 유학을 갔다고 한다. 당시의 유학 열풍으로 동경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됐다. 소위 강남 8학군 학교를 다니던 그의 친구들은 주로 방학을 이용해 외국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중학교 1학년, 자퇴를 결심했다.


    "그때 당시에는 파격적이었죠. 거의 고위층 자녀들만 했던 교육방식이었으니까요. 어머니께서 먼저 홈스쿨링을 제안하셨어요. 제가 다른 친구들보다 영어를 늦게 배운 편이었어요. 홈스쿨링을 하면서 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었어요."


    그가 자퇴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는 한국 학교 교육에 적응을 잘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수학학원 원장이었고, 원장 아들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상하다고 말하며 웃기도 했다.


    "어머니 학원의 명성이 저의 수학성적과 직결되는 거였어요. 항상 100점을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컸었지요. 하지만 부모님도 부담이셨겠죠."


    자퇴를 했지만 그는 학교가 너무 그리워졌다. 학교를 가지 않는 것이 그에겐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떤 날은 오전 9시에 친구의 집에 전화를 하기도 했다. 친구가 학교에 가있다는 것을 까먹은 것이다. 너무 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그것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 교환학생을 가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가 우스갯소리로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저는 입학하고 졸업한 학교들이 다 다르다고요.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입학하고 졸업한 학교가 달라요(웃음)."


    그는 당시 10학년 과정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유학을 가서 외롭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골마을로 가 옥수수밭을 뛰놀며 자랐다. 콘크리트건물로 둘러 쌓인 서울을 떠나 평화로운 미국의 시골마을은 그에게 큰 휴식을 줬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유학생활은 저에게 필요했던 일종의 쉼이 아니었나 싶어요. 한국에서 학업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원 없이 뛰어 놀았어요. 그때 자신감도 다시 커질 수 있었고요."


    그는 SAT를 목적으로 하는 사립고등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 교육을 받는 공립학교로 진학했다. 공립학교와 사립학교는 많이 달랐다. 그가 다니던 학교는 도전할 수 있는 일들이 가득했다. 그는 공립학교를 다니면서 학문적인 것으로도 배울 수 없는 무언가를 채울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골고루 다 잘해야 하잖아요. 어떤 과목의 성적이 부족하면 그 성적을 올리라고 압박을 주죠. 미국은 달랐어요. 잘하는 과목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해줘요. 그 분야의 영재로 키우는 거죠."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검정고시를 1년 준비한 후 세종대 호텔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곧바로 호주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도전했다. 그는 현재 호주 시민권을 갖고 있다. 이제 자신의 원래 꿈이었던 호주항공 관제사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명함에 적혀있는 핸드폰 번호도 항공기 기종에서 따왔다.


    그가 힘든 유학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힘에는 민은자 대표의 공이 컸다. 그는 처음 드림아이에듀의 슬로건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엄마의 마음으로’라는 슬로건은 이 회사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문장이다. 민 대표는 그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었다.


    "민 대표님은 맺어진 관계에 대해서 중시하는 분이에요. 저에게 정말 많은 얘기를 해주셨어요. 항상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한 순간도 너를 잊은 적 없다는 말을 해주셨어요. 그 말 한마디들이 제가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어요."


    그는 한국 청년들 대부분이 공무원을 꿈꾸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청소년이 원하는 장래희망 1위로 공무원이 뽑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남달랐다.


    "공무원, 좋은 직업이죠. 꿈꾸는 것도 좋지만 오히려 더 넓게 놀면 어떨까요? 국제적인 공무원이요."


    "엄마의 마음으로"


    # 민은자 드림아이에듀 대표



    민은자 대표는 자신을 거쳐갔던 아이들은 모두 기억하고 사랑한다. 그는 사업보다 아이들의 행복이 더 우선인 사람이었다. 아이들의 교육에 사심이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사심으로 시작하게 되면 언젠간 ‘독’이 돼요. 제가 만약 사업적 마인드만을 갖고 이 일을 시작했다면 지금쯤이면 커다란 펜트하우스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부모들도 알아야 해요. 사심을 가지면 절대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요."


    민 대표는 수많은 문제아들도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는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청소년 문제 때문에 속상해서 자다가도 일어난다고 한다. 민 대표는 새로운 유학생을 받을 때 아이와 부모 모두의 인성을 본다.


    "문제아 부모들이 자식의 행동을 왜 모르겠어요. 부모가 이상하면 아이도 문제가 있더라고요. 저희는 무조건 계약하지 않아요. 먼저 부모를 보고 아이의 미래성을 봐요."


    민은자 대표와 두 청년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두 청년에게 민 대표는 엄마이자 선생이었고, 그에게 두 청년은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민 대표의 따뜻한 인성은 두 청년이 마음껏 세상 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 두 청년들은 진정으로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이미 깨달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