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의 유혹... 상품권, 검은돈이 되다

    입력 : 2017.09.20 09:12

    [뇌물·비자금용으로 잇단 적발]


    자금 세탁 방지 대상서 예외, 현금 전환 쉬워 작년 10兆 발행
    무제한 살 수 있고 기록 안남아… 이탈 막을 법적인 장치 필요


    최근 비자금 조성 혐의로 수사가 진행 중인 대구은행의 비자금 마련 방법은 바로 '상품권 할인(속칭 상품권 깡)'이었다. 회사 법인카드로 백화점 상품권을 구입한 뒤 상품권 중개업소에 5% 내외 수수료를 주고 상품권을 내다 팔아 현금을 확보하는 수법이다. 대구은행이 이렇게 조성한 비자금은 30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수사 중인 KAI(한국항공우주산업)도 17억원 상당 상품권을 군 장성 로비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계에서는 이번 사건으로 상품권이 부각되고 있지만 실제 검은 거래에 쓰이는 상품권 규모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본다. '자금 세탁 방지' 대상에 상품권만 예외로 돼 있기 때문이다.


    ◇'환금성' 무기로 발행 급증


    지난해 조폐공사가 발행한 종이 상품권은 8조8858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최근 급증하는 '기프티콘' 등 모바일 상품권 발행액을 합하면 10조원을 훨씬 넘는다는 게 금융계 추정이다.


    상품권의 최대 강점은 '환금성'이다. 상품권 발행 업체들이 제휴처를 늘리면서 여러 곳에서 상품권을 쓸 수 있다. 백화점 상품권을 식당·주유소·극장 등에서 쓰는 식이다. 이 때문에 상품권은 현금과 다름없는 대접을 받고 있다. 서울 명동 등에 있는 상품권 중개업소에 가면 5% 정도 수수료를 주면 상품권을 현금과 바꿀 수 있다. 10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을 9만5000원 현금으로 바꿔준다.



    이런 장점 때문에 상품권이 선호되면서 상품권 발행이 급증하고 있다. 현대차 등 대기업은 명절 상여금 일부를 상품권으로 지급한다. 그런데 상당수 거래가 불투명하다. 상품권은 법인카드로 사실상 무제한 구입할 수 있다. 회사 직원은 누구나 본인 신분증과 사업자 등록증만 가져가면 법인카드로 상품권을 구매할 수 있다. 장부에는 접대비로 기록하면 된다.


    상품권은 대부분 선물용으로 쓰이지만 대구은행처럼 비자금 조성에 사용하는 기업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KAI처럼 뇌물용으로 사용하는 기업은 '50만원권' 같은 고액 상품권을 주로 활용한다. 현금 5만원권과 비교해 10분의 1 부피로 뇌물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사고 쓰는지 아무도 몰라


    예전엔 상품권 거래에 규제가 심했다. 정부 인가를 받아야 상품권 발행이 가능했고, 정부가 연간 발행 규모를 통제했다. 또 발행 기업은 판매 내역을 보관했다가 정부가 요청하면 제출해야 했다. 1970년대엔 "과소비를 막겠다"며 상품권 발행을 금지한 적도 있다. 하지만 1999년 '상품권법'이 폐지되고 2002년 법인카드로 상품권 구매가 가능해지면서 상품권 발행과 구입에 고삐가 모두 풀렸다.


    현재 기업들은 인지세만 내면 상품권을 무제한 발행할 수 있고, 구입에도 아무런 제한이 없다. 백화점 등은 상품권 판매 기록을 보존하지 않고 장부에 따로 적어놓지도 않는다. 금융계 관계자는 "정부가 2000만원 이상 계좌 이체 등 고액 금융 거래는 실시간으로 감시하지만 상품권은 손 놓고 있어 감시 사각지대에 있다"고 지적했다.


    외국은 다르다. 미국 등은 '자금 세탁 방지 규정'에 따라 우리나라 상품권 역할을 하는 기프트카드 판매 때 구입자 신원을 확인하고 거래 기록을 보유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자금 세탁 방지 규정을 갖고 있지만 상품권만 예외로 돼 있다. 이에 따라 금융정보분석원 등은 다른 자금 출처는 실시간 감시하면서 상품권만 확인하지 않는다.


    현재 국회에서 상품권법 부활이 논의되고 있다. 정부에 신고한 사업자만 상품권을 발행할 수 있고, 판매할 때는 상품권 판매 내역을 기록 보존해 누가 얼마나 샀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상품권을 사용한 사람은 현금영수증을 발급받도록 해 누가 선물받았는지 알 수 있게 하자는 규정도 있다. 이에 대해 기업들은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박종상 숙명여대 교수는 "판매 단계에서 고액·의심 거래 등을 정부에 보고하도록 하면서 발행 전 등록 등 의무는 고액 상품권에만 부과하면 불필요한 규제 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