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개] 지구 모든 곳에서 굳건하게 살아 남은 '식물처럼 살기'

  • 조선닷컴 뉴미디어경영센터

    입력 : 2017.08.30 17:37

    식물처럼 살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하고 고민하는 수많은 현대인을 위한 철학·인문 교양서이다. '식물처럼 살기'라는 제목은 흔히 '동물처럼 살기'와 반대 개념으로 여겨져, 대강 어떤 내용의 책일지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저 단순히 '어떻게 살자'고 주장하며 답을 던지는 자기계발서는 아니다. 저자는 오랫동안 철학 연구와 강의를 해온 학자로서,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식물에 빗대어 친근하고 쉽게 접근하고자 애썼다. 이 책은 삶의 여러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많은 독자들에게 따뜻하고 싱그러운 오아시스가 되기 충분할 것이다.


    식물에게 시선 돌리기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된 이후, 지구는 전쟁, 살육, 테러, 분쟁, 환경파괴 등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인간이 동물종의 하나라는 생각 또한 부작용을 가져왔다. 탐욕, 공격성을 동물에 빗대어 포장했으며, '동물적 인간'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연스러운 속성으로 위장했다. 이러한 역사는 지구 생태계를 파괴했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물질적 풍요 속에, 엄청난 발전 속에서 인간은 과연 진짜 행복한가? 잘 살고 있는 걸까?


    흔히 동물은 강한 존재, 식물은 약한 존재라 여기기 쉽지만, 사실 식물은 어마어마한 존재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내지 못하고 무심히 살아왔을 뿐이다. 이제 관심을 식물에게 돌리고, 그 목소리에 귀를 가만히 기울여 보자.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식물은 언제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었다. 인류가 지구에 살기 훨씬 전부터, 공룡이 지구를 점령하던 시절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싹을 틔웠다. 또한 아프리카 초원부터 히말라야의 높은 산, 적도의 늪, 깊은 바다에도 황량한 들에도, 시골집 마당 한 모퉁이에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식물이야말로 지구의 진정한 주인이라 여겨질 정도로 오랜 시간, 모든 곳에서 굳건하게 살아남았다. 인간을 비롯한 많은 동물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산소를 주고, 약을 주고, 그늘을 주면서. 지구상에 식물이 없었다면, 인간은 결코 지금처럼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벼와 과일 같은 식물들은 인간에게 길들여져서 재배되기도 하고, 그 수확물은 인간의 몫이 되었지만, 사실 식물이 인간을 길들였다. 인간이 거부반응 없이 식물을 사랑하고, 살리고, 널리 번식시키도록 식물이 긴긴 시간 동안 인간을 길들여온 셈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진화의 최고점이라고 자랑할지 모르지만, 그 진화는 식물과의 공진화였다.


    이제 시선을 돌려, 나무와 꽃, 풀, 이파리와 열매가 들려주는 지혜를 배우자. 식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 우리의 고민에 대한 조언, 우리가 닥친 위기에 대한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식물에게서 포용력과 넉넉함을, 그들의 뛰어난 생산능력과 생존기교를, 그들의 고독과 재활능력을, 그리고 그들의 기민성과 생활력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식물처럼 살기'는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식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식물의 지혜를 배우자. 그들이 험난한 지구에서 지금까지 살아 낸 것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인지 모르지 않는가? 이제 나무와 꽃, 풀, 이파리와 열매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의 고민에 대한 조언이, 우리가 닥친 위기에 대한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식물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를 쉽게 정리해 담았으며, 다양한 사례와 삽화, 시를 통해 친근감 있게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저자는 다정하고 쉬운 문체로 조곤조곤히 어떻게 식물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 식물처럼 살아가면서 우리 삶을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꾸려나갈 수 있을지 그 답을 들려주고자 노력했다. 우리가 새롭게 관심과 애정으로 지켜볼 식물의 눈부신 싱그러움과 따뜻한 보드라움은 우리를 다시 행복한 삶으로 안내할 것이다.


    식물처럼 살기, 고고하게 아름답게!


    인간은 식물을 우리의 삶 속으로 끌어들여 애지중지 씨앗을 심고 키우고 가꾸어 왔다. 하찮아 보이는 풀들까지 식용으로 약용으로 다양하게 활용하고 이용했다. 따라서 인간은 오래전부터 식물의 생존과 번식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식물이 주는 유용함 때문일까, 희망과 감동 때문일까? 굳이 그 이유를 나누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무가 신성시되고 꽃이 고귀하게 여겨진 것은 식물이 우리에게 정신적 평화와 육체적 만족을 모두 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식물의 작은 씨앗에서 인류의 문명이 싹텄다. 어린 묘목은 인류가 깃들 거처로 자라났다.


    식물은 싹을 틔울 때 바깥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식물은 떡잎을 키울 때 그저 자기 본성을 키운다. 자기 삶을 산다. 과정은 험난하고 끊임없는 공격과 습격을 받지만 말이다. 때로는 어렵사리 키워낸 눈을 떨구어야 하고 사랑을 위해 피운 꽃이 그대로 시들어버리는 아픔의 시간도 참아낸다. 조금만 있으면 다 키울 열매가 태풍에 떨어져 버리는 순간에도 식물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왜 내가 싹을 냈고, 가지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는지 속상해 하지 않는다. 그저 고고하게 묵묵히 살고 있을 뿐이다. 그저 당당하게 자기 자신 그대로를 산다. 그래서 식물은 제각각 모두 아름답다. 곤충에 갉힌 이파리도 예쁘고 바람에 꺾인 가지도 멋있다. 바람에 우수수 흩어져 날리는 꽃잎도, 신비롭고 덜 익은 풋열매도 사랑스럽다. 생명이기에, 생명이 지닌 모든 속성과 생명이 겪는 모든 사건을 안고 꼿꼿이 살아가는 식물은 아름답다.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이야기하고 그런 삶을 동경한다. '진리의 삶'이나 '착한 인생' 같은 것보다 ‘아름다움’을 선호한다. 그래서 미를 창조하는 예술가를 동경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아름다운 삶'은 진리와 선함과 성스러움을 모두 포함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진리의 삶, 착한 인생, 성스러운 삶 등은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 있지만 '아름다운 인생'은 이 모든 것들을 아울러 내는 것이 아닐까?


    지금 집 밖으로 나가서 나무를 보자. 작은 풀, 발에 순순히 밟히는 잡초를 보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을 걸어보자. 나무둥치의 까진 껍질은 어떻게 생겼는지, 누렇게 뜬 이파리는 왜 그런지, 밟혀서 누워버린 잡초의 기분은 어떤지, 뜰의 조경을 위해 형제인 가지들을 잃은 식물의 심정은 어떤지.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삶이라고. 살아있음에 생기는 일들이니까 아무것도 아니고, 흔히 있는 일이라고. 용서가 그들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고 자신을 주는 것 또한 일상일 뿐이다. 그들의 열매와 꽃을 고마워하는 이가 없어도, 그들의 존재를 무심히 지나쳐도, 그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식물은 고고하다. 당당하다. 그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