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서 지갑 닫은 중산층, 해외선 카드 4조7000억원 긁었다

    입력 : 2017.08.25 09:54

    [국외 여행객 크게 늘며 2분기 해외 카드 결제액 20% 증가]


    - 국내·해외 소비 양극화
    불황 장기화되며 내수부진 지속, 올 1분기 소비증가율 겨우 1.17%
    한국 찾는 외국인 관광객도 급감


    - 국내 관광 가성비 떨어져
    큰마음 먹고 여행가려고 해도 보라카이 3박4일 30만원인데
    제주는 2박3일에 30만~40만원


    대기업에 다니는 양모(여·31)씨는 지난 6월 말 9박 10일 일정으로 하와이 여행을 다녀왔다. 저가 항공을 예약해 왕복 비행기 값은 50만원, 숙박은 에어비앤비로 예약해 1박당 100~150달러(약 11만~17만원)가 들었다. 숙소는 미국 중산층이 주로 이용하는 펜션으로 수영장과 자쿠지(기포가 나오는 욕조)가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요즘 직장인들 휴가가 길어지는데 한국에는 10일씩 시간을 보낼 만한 휴양지가 없다"며 "숙소에서 수영하고 쉬다가 관광과 쇼핑하는 일정으로 휴가를 만끽했다"고 말했다.


    불황이 장기화되며 국내 소비가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해외 소비는 10~20% 넘는 증가율(전년 동기 대비)을 기록하며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중산층·고소득층이 국내에서는 지갑을 닫고 해외 씀씀이를 늘리는 바람에 국내·해외 소비의 양극화가 깊어지는 것이다.


    ◇뛰는 해외 소비, 기는 국내 소비


    한국은행이 24일 발표한 '2분기 중 거주자의 카드 해외 사용 실적'에 따르면, 4~6월 내국인이 해외에서 카드(신용·체크·직불카드)로 결제한 금액은 41억8300만달러(약 4조7267억원)로 전년 동기(34억7000만달러) 대비 20.6% 급증했다. 해외 카드 사용액은 1분기(40억2000만달러)에 이어 2분기 최대치를 경신했다. 해외 카드 사용이 늘어난 것은 해외여행객이 늘었기 때문이다. 2분기 해외여행객은 611만명으로 전년 동기(507만명)에 비해 104만명(20.5%) 늘었다.


    반면 국내 소비는 좀처럼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정체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소비지출 증가율(전년 동기 대비)은 작년 4분기에 1.65%에 그친 데 이어 올 1분기에는 1.17%로 떨어졌다. 해외 카드 사용 증가 폭의 20분의 1 수준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그래픽=김현국 기자


    국내 소비 부진의 주요인은 실질소득이 제자리걸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2분기 가계 동향에 따르면, 4~6월 가구의 실질소득 증가율은 전년 동기 대비 0.97% 감소했다. 실질 가구 소득 증가율은 지난해 3분기부터 4분기 연속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중국의 '사드 보복'과 북핵 위기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급감한 것도 내수 부진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한국관광공사는 24일 "7월까지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776만명으로 작년 같은 기간(981만명)에 비해 20% 이상 감소했다"며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올해 방한 외국인 관광객은 1256만명 정도로, 지난해(1724만명)보다 27% 감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광공사는 올해 관광수지 적자 폭이 150억달러(약 17조원)로 사상 최악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소비 양극화, 관광 인프라 부족 탓


    국내·해외 소비의 불균형이 확대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우선 소득 양극화가 큰 원인으로 지적된다. 형편이 되는 중·상류층은 해외여행을 늘리는 반면, 저소득층은 국내 여행도 선뜻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통계청 가계 동향 조사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 가구가 한 달에 여행비로 지출하는 금액은 2014년 9443원에서 2016년 8992원으로 4.8% 감소했다. 반면 상위 20% 가구의 월평균 여행비는 같은 기간 7만6040원에서 8만992원으로 6.5% 늘었다. 중산층인 4분위(소득 상위 20~40%) 가구의 여행비 지출은 같은 기간 18.8% 급증했다.


    해외여행에 비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낮고 부실한 국내 관광 인프라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국내 대형 여행사가 팔고 있는 국내외 패키지 여행 상품 가격을 비교했더니, 제주도는 2박 3일에 30만~40만원대였지만, 중국 북경 초특가 여행은 19만9000원부터, 필리핀 보라카이 3박 4일 상품은 29만9000원부터 팔고 있었다.


    특히 성수기 천정부지로 오르는 바가지요금이 문제다. 통계청의 7월 소비자 물가 동향에 따르면, 여름 성수기 숙박 요금이 대폭 올랐다. 7월 콘도 이용료는 6월보다 21% 급등했고, 호텔 숙박료도 한 달 만에 9.7% 올랐다. 더 큰 문제는 휴가가 집중되는 극성수기에는 고급 숙박시설이 부족해 아무리 비싼 요금을 지불해도 숙박을 예약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8월 초에 강릉에 새로 지은 특급호텔을 이용하려 했는데, 1박에 77만원인데도 이미 예약이 끝났다"며 "할 수 없이 일본으로 휴가를 다녀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