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째... 이름도 못 바꾸는 전경련

    입력 : 2017.08.23 09:25

    [혁신 작업 지지부진한 속사정]


    한국기업연합회로 개명 추진… 정관변경 신청부터 해야 하지만
    '해체 촉구 결의안' 발의된 마당에 "면죄부 줬다"는 여당 비판 우려
    국감 끝날 때까지 납작 엎드려
    "50년 축적한 해외 네트워크 등 자산 무시하는 건 손실" 지적도


    "지난 50년간 사용해온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라는 명칭을 '한국기업연합회(한기연)'로 바꾸겠습니다."


    지난 3월 24일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기자들 앞에 서서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이 같은 혁신안을 발표했다. 그동안 전경련은 '최순실 게이트'의 미르·K스포츠 재단을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 삼성전자·현대차 등 주요 회원사가 탈퇴하는 등 존폐 위기에 몰렸다. 환골탈태를 위해 반세기 동안 한국 재계를 대표했던 '전경련'이라는 이름부터 당장 버리기로 했다.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은 "'경제인'(회장) 중심 협의체에서 '기업'이 중심이 되는 경제 단체로 거듭나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러나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전경련은 여전히 전경련이다.


    ◇5개월 동안 이름도 못 바꾼 전경련


    사단법인인 전경련이 이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정관변경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전경련은 아직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에 정관변경 신청조차 못하고 있다. 앞서 내부적으로 열어야 하는 이사회와 회원사 총회도 못 열고 있다. 당초 약속했던 전문 경영인 중심의 경영이사회 체제로의 전환도 요원하다. 정관변경 없이 가능한 조직변경(사회본부 폐지 등)과 사회협력회계 폐지만 당장 실행했다. 전경련 측은 "지난 4월에는 대선 국면이어서 정관변경 신청을 못했고, 그 이후에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인사를 기다리느라 못했다"며 "산업부 실국장 인사도 최근에서야 이뤄졌기 때문에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밝혔다.


    사진= 김연정 객원기자


    재계에서는 전경련이 아직까지 개명(改名) 신청을 못하고 있는 것은 정관변경 신청이 가져올 '리스크' 때문이란 시각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현재 국회에서는 여당 의원들이 '전경련 해체 촉구 결의안'까지 발의돼 있는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산업부가 개명 신청을 허가해주면,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어 미루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경련 입장에서는 자칫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9월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이슈화되면 전경련은 또다시 논란 속으로 휩쓸릴 수도 있다. 게다가 산업부가 만에 하나 정관변경을 허가해주지 않으면 존립 자체가 휘청할 수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국정감사가 끝날 때까지는 납작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통상 이슈 등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재계에서는 '전경련 패싱(passing·배제)'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뒤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은 대한상공회의소로 넘어갔고 전경련을 '왕따'시키는 분위기이다. 문재인 정부의 첫 방미 경제사절단을 꾸리는 일부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4대 그룹 CEO와의 정책 간담회, 일자리 15대 기업 초청 정책간담회, 주요 기업인들의 청와대 회동 등을 모두 대한상의가 주도했다. 허창수 회장은 방미 경제사절단과 청와대 회동에 참석했지만, 전경련 회장 자격이 아니라 GS그룹 회장 자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원사와 조직원들의 이탈도 가속화되고 있다. 전경련은 한때 639개사였던 회원사가 지금은 510개로 줄어들었고, 전체 회비의 절반을 책임지는 4대 그룹이 모두 탈퇴한 상태다. 이에 최근 임원과 직원 임금을 각각 40%, 30% 줄이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도 했다. 200명에 달하던 임직원 숫자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


    전문가들은 "전경련이 납작 엎드려 있는 게 능사가 아니다"라며 "이럴 때일수록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전경련이 매년 미국 기업인·고위 공무원들과 함께 여는 '한·미 재계회의'는 '한·미 FTA 재협상' 이슈가 불거진 요즘 활용하기 좋은 자원이다. 이 회의에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상무부 부장관,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왔고, 오는 10월 예정된 회의에는 월버 로스 상무부 장관과의 간담회도 추진 중이다. 최준선 한국기업법연구소 이사장은 "전경련이 50년 넘는 역사 동안 축적된 해외 네트워크 등 유·무형의 훌륭한 자산이 있는데, 무조건 무시하는 것은 기업뿐 아니라 정부나 국가 차원에도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전경련이 미르·K스포츠재단 출범의 주범이라는 질타했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기소됐거나 법적 처벌을 받은 전경련 구성원은 단 한 명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