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록스의 AI인재 80명은 네이버를 선택했다

    입력 : 2017.06.28 09:18

    [네이버, 세계 정상급인 제록스 유럽연구소(XRCE) 인수]


    - 美·유럽·중국도 눈독 들였지만…
    XRCE 연구원들, 글로벌기업보다 네이버 성장스토리·비전에 공감
    사원협의회서 최종 낙점


    - 이해진의 거침없는 투자
    음성인식·클라우드·디지털금융… 올해 20여곳 투자하거나 사들여


    인공지능 관련 특허만 1000여건 - 프랑스 동남부 그르노블 지방에 있는 제록스리서치센터유럽(XRCE) 전경. 1993년 설립돼 20년 이상 인공지능 관련 연구·개발을 진행한 세계적인 연구소다. 네이버는 이 센터 이름을 '네이버랩스 유럽'으로 변경하고, 인공지능, 기계학습, 컴퓨터 비전, 자연어 처리 등 미래 기술 분야 육성에 주력한다고 밝혔다. /네이버

    인터넷 기업 네이버가 프랑스에 있는 인공지능 연구소 제록스리서치센터유럽(XRCE)을 전격 인수한다. 국내 인터넷 기업이 글로벌 기업의 R&D(연구·개발)센터를 통째로 인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인수 금액은 1000억원 안팎인 것으로 전해졌다. 네이버는 오는 9월까지 인수를 마무리한 뒤 연구소 이름을 '네이버랩스 유럽'으로 변경할 계획이다.


    XRCE는 미국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의 원조 격인 제록스가 1993년 프랑스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그르노블 지역에 설립한 유럽 거점 연구소다. 20년 이상 줄곧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을 연구해 관련 특허 1000여건을 보유하고 있다.


    XRCE는 2013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선정한 '가장 혁신적인 기업·연구소 50'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구글의 딥마인드, 페이스북의 AI리서치센터, 마이크로소프트의 MS리서치센터 등과 함께 세계 AI 연구를 선도하는 4대 연구소에 포함된다. 네이버 송창현 최고기술책임자(CTO)는 "네이버가 인공지능 연구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하는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인수로 네이버는 단 이틀 만에 1조원 이상을 신규 사업에 쏟아붓는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 초부터 따지면 무려 20여곳의 크고 작은 기업과 연구소를 사들이며 테크놀로지 기업으로의 변신을 서두르고 있다.


    ◇세계 정상급 AI 연구소 인수


    XRCE 인수전에는 미국·유럽·중국에서 네이버보다 훨씬 큰 글로벌 IT(정보기술) 기업들이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네임 밸류(지명도)'에서 불리했다. 하지만 송창현 CTO는 올해 초 XRCE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현지로 날아갔다. 4~5월에 프랑스에 살다시피 하면서 제록스는 물론이고 XRCE 연구원을 상대로 수차례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며 한국과 일본에서 거둔 네이버의 성장 스토리를 알린 것으로 전해졌다. XRCE 사원협의회는 "네이버랩스가 추진하는 연구 분야가 XRCE와 가장 비슷한 데다 조직 문화가 유연해 XRCE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협업(協業)할 수 있다"고 판단해 네이버를 낙점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가 이번 인수에 전력한 데는 아무리 돈을 들여도 인공지능 분야의 S급 인재 한 명 영입도 수월하지 않은 현실 때문이다. 구글·아마존·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엔비디아·바이두와 같이 한발 앞서 이 분야에 뛰어든 기업들이 인재를 싹쓸이하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는 이번 XRCE 인수로 구글이 딥마인드를 인수할 때보다 많은 S급 연구원 80여명을 한꺼번에 확보하게 된다.


    네이버는 올 1월 연구·개발 조직인 네이버랩스를 자회사로 떼어내면서 인공지능 개발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상태다. 네이버랩스의 대표를 겸직하는 송창현 CTO는 "XRCE는 세계적인 연구진이 대거 포진한 곳"이라며 "컴퓨터 비전, 머신러닝(기계학습), 자연어 처리 등 XRCE의 세계적인 연구 성과에다 네이버랩스의 기술력을 더하면 큰 시너지(상승효과)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제록스는 다만 XRCE를 매각하면서도 연구소의 보유 특허 1000건은 양도하지 않았다. 네이버는 인수 계약과 함께 이들 특허의 사용권만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록스가 한창 뜨는 AI 연구소를 매각하는 배경에는 월가의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의 요구도 한몫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2015년 말 제록스의 7% 지분을 인수한 칼 아이칸은 이듬해 회사 분할을 관철시켰고 올해 들어서는 사무기기 본업과 무관하면서 당장 돈을 벌지 못하는 연구소들의 정리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손정의를 연상케 하는 이해진의 확장


    네이버는 작년 말부터 프랑스 음향 기기 업체 드비알레, 미국 음성 인식 기술 업체 사운드하운드, 일본 인공지능 벤처 윈클 등 AI와 음성 인식, 음향 기술 분야의 기업들을 쉴새 없이 사들이고 있다.


    26일에는 미래에셋대우와 제휴해 AI 기반의 디지털 금융 법인을 설립하기로 하고 서로 자사주 5000억원씩을 취득하는 상호 지분 투자를 결정했다. 미래에셋대우가 보유한 금융 빅데이터에 네이버의 AI 기술을 적용해 새로운 금융시장을 개척하겠다는 것이다. 같은 날 경기도 용인시에 3년간 4800억원을 들여 약 13만㎡(4만평) 규모의 대형 데이터센터를 새로 짓는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아마존·구글 등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글로벌 클라우드(가상 저장 공간) 시장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네이버의 전방위적인 투자는 네이버의 이해진 창업자가 주도하고 있다. 올 초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난 이 창업자는 글로벌인베스트먼트오피서(GIO)라는 직함을 맡아 주로 유럽에 머물고 있다.


    이런 거침없는 행보는 일본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로 시작해 거침없는 인수로 이동통신·전자상거래·로봇·에너지 등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을 일군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떠올리게 한다. 이해진 창업자를 잘 아는 인터넷 업계 한 관계자는 "이해진 창업자는 네이버 보유 지분이 5%도 안 되기 때문에 경영권 승계는 아예 불가능하고 그럴 생각도 없다"면서 "네이버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는 게 창업자로서 마지막 도전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