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寺' '한경庵'... 청와대 호통에 말문 막힌 재계

    입력 : 2017.06.02 09:02

    [일자리委, 재계와 대화 한번 없이 '일자리 100일 계획' 발표]


    - 일자리·최저임금에 재계는 소외?
    "최저임금 1만원 미리 정해놓고 밀어붙이면 공평한 대화 되겠나"


    - 트럼프도 재계와 소통하는데…
    프랑스 마크롱은 취임 9일 만에 재계·노조와 고용유연성 논의


    "우리는 대화 한번 해본 적이 없습니다."


    1일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가 '일자리 100일 계획'을 발표하자 재계에서는 이런 탄식이 흘러나왔다. 일자리위는 '노사정 경제 협의채널'을 표방하며, 정부 위원과 민간 위원 각각 15명으로 구성하겠다고 했다. 재계 목소리도 귀 기울이겠다는 취지로, 민간 위원에 대한상의·경총·중기중앙회 대표를 양 노총 대표와 함께 포함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이날 발표 직후 경제단체 관계자들은 "회의나 발표가 있다는 말조차 들은 적이 없다"면서 "재계와는 일정 논의나 협의도 없이 논란 많은 최저임금 1만원이나 고용부담금 등의 정책을 아주 구체적으로 발표한 걸 보면 대화의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요즘 재계는 정부에 목소리를 낼 창구 조차 없어 속앓이를 하고 있다. 지난 25일 정규직 전환 정책을 비판한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 청와대와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 등이 "반성부터 하라"는 취지로 호통을 치면서 개별 기업은 물론 경제단체들도 일제히 입을 닫고 있다. 조만간 결론을 내야 할 내년도 최저임금 문제나 일자리위원회의 구체적인 정책에 경제계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 자체가 실종됐다. 재계 관계자는 "지금 같은 분위기에선 정부와 노동계 주장에 일방적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번 달 '내년 최저임금' 협상 본격화… 경영계 "정부가 이미 결론 정해놔"


    올해 최대 노사 이슈는 '최저임금'이다. 경영계·노동계·공익 위원 27명(각 9명)으로 구성된 최저임금위원회는 1일 2차 전원회의를 연 것을 시작으로 이달 29일까지 내년도 최저임금을 의결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경영계는 "정부가 재계에 호통치고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있는 마당에, 제대로 된 협상이 가능할지 의문"이라며 불안해하고 있다.


    과거엔 경영계와 노동계가 대립하면 정부가 중재하는 정도 역할을 했지만, 이날 이용섭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은 '일자리 100일 계획'을 발표하면서 2020년 최저임금 1만원 달성 방침을 재확인했다. 연평균 16%의 높은 인상률이다. 고용노동부도 지난달 국정기획자문위에 같은 내용으로 업무보고를 해놓았다. 최저임금위에 경영계 측은 경총·전경련·중기중앙회·소상공인연합회 등 관계자들이 참석하지만, 이 중 제 목소리를 낼 만한 단체는 소상공인연합회 정도다.



    그동안 재계 목소리를 대변해온 대표 단체였던 전경련과 한경연(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해 '최순실 사태'로 존폐 위기에 처한 뒤 숨죽여 있다. 조용한 절간 같다고 해서 '전경사(寺), 한경암(庵)'이라는 얘기까지 듣고 있다. 경총은 최근 청와대의 일격을 맞은 뒤 안팎의 눈치를 보고 있다. 대한상의나 중기중앙회는 정부 지원을 받는 법정단체로 정부 정책에 반하는 입장을 내놓기 꺼린다.


    ◇트럼프·마크롱은 취임 전후 기업인과 적극 대화


    재계는 새 정부가 주요 경제단체들을 '적폐'로 낙인찍은 뒤 정부 방침에 따르지 않는다고 채찍을 가한다면 결국 '거수기 단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주요 해외 정상들은 재계를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의 파트너로 보고 대화와 협력을 이어가는 것과는 정반대라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당선 후 취임도 하기 전에 자신을 반대했던 팀 쿡 애플 CEO 등 실리콘 밸리 거물 12명을 초청해 "나는 당신들이 잘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라며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중도 성향인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취임 9일 만에 주요 경제단체, 노조 대표와 1대1 면담을 갖고 '고용 유연성'을 통한 경제성장책을 논의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2년 취임한 지 3일 만에 일본 상의 회장을 만나는 등 재계 인사와 꾸준히 만났다. 취임 직후 총리 직속으로 만든 '산업 경쟁력 회의'는 장관과 미즈호·로손 등 대기업 CEO들이 직접 참석할 정도다.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와 관련해 여러 개혁이 필요하겠지만 지금처럼 정부가 재계를 '악'으로 몰아붙이고 팔을 비트는 방식이 돼서는 곤란하다"며 "정부도 기업의 애로사항을 들어보고, 재계도 뭘 할 수 있는지를 얘기하는 협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