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속 뭉칫돈 68兆 돌파... 일본 전철 밟나

    입력 : 2017.05.02 09:11

    ['장롱 예금' 급증… 실태와 전망]


    7년간 풀린 5만원권 135조원… 韓銀에 돌아온 건 60조 채 안 돼
    개인 금고 판매 1년새 15% 증가


    저금리에 북한 리스크 부각되며 금융 상품보다 현금 선호 풍조
    세금 징수 피하려는 속셈도


    日선 중산층 소비 축소와 맞물려… 소비 위축 동반 땐 경기에 찬물


    대전의 유명 음식점 주인 N씨가 현금 8억4500만원을 집 장롱 속에 넣어뒀다가 지난달 도둑맞았다. 전부 5만원짜리 지폐였다. 낱장으론 1만6900장. N씨는 5만원권 100장씩을 고무줄로 묶은 뒤, 10다발씩 신문지에 싸놓았었다고 한다. 도둑들은 쌀포대 2개에 이 돈을 담아 나갔다. 무게만 20㎏이었다.


    신용카드 이용이 전체 결제액의 절반을 넘어서며 '현금 없는 사회'로 성큼 접어든 시대에, '초(超)거액 현금 뭉치'를 장롱에 쌓아둔 이유는 뭘까. N씨는 "돈 모으는 재미로 집에 보관했다"고만 경찰에 진술했다. 과연 그럴까.


    우리보다 앞서 초저금리 시대를 겪으며 이런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난 일본에선, 이런 돈을 두고 '장롱 예금'이라 불렀다. '장롱 예금'이 국내에는 얼마나 많은 걸까. 또 장롱 예금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가계 현금 보유 68조원 돌파, 시중에 5만원권 75조원


    작년 말 기준, 우리나라 가계의 금융 자산 중 현금이 68조2610억원(한국은행 '2016년 자금순환')이었다. 예금, 보험, 채권, 주식, 펀드 등에 넣은 돈을 빼고 순전히 현금으로 들고 있는 게 이만큼이었다.



    가계의 현금 자산은 해마다 늘어왔다. 2013년 39조원대에서 2014년 47조원대, 2015년 58조원대에 이어 작년 68조원대로 연간 10조원 안팎으로 커졌다. 가계의 현금 자산이 전체 금융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1.4%대에서 2%대로 올라갔다.


    보관의 편리함을 감안하면, 가계가 들고 있는 현금의 대부분은 5만원권 지폐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유통 중인 화폐 가운데 최고액권인 5만원짜리는 2009년 처음 발행됐다. 작년 말까지 한은(韓銀)이 시중에 내보낸 5만원권 액수는 135조원이 조금 넘는다. 같은 기간 한은에 돌아온 5만원권은 60조원이 조금 안 된다. 시중에 풀려 있는 5만원짜리가 75조원이 넘는다는 얘기다.


    ◇개인용 금고 판매 15% 증가… "대형 금고, 더 잘 팔려"


    현금을 집에 보관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국정 농단' 사태의 장본인 최순실씨는 두루마리 휴지심에 5만원짜리를 300만원씩 꽂아뒀다가 꺼내 썼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용 금고에 현금을 보관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최씨도 집에 금고 2대를 놓고 지냈다고 한다.


    국내 금고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선일금고의 올 1분기 개인용 금고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15% 증가했다. 작년 한 해 동안 판매 증가율(12%)과 비교하면, 요즘에 금고가 더 잘 팔리고 있는 것이다. 선일금고 관계자는 "금고 판매가 늘기도 하지만, 갈수록 용량이 큰 금고가 더 잘 나간다"고 말했다. 40L 용량 금고보다 70~80L 용량 금고 인기가 더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금고 속에 뭔가를 더 많이 채워 넣고 있다는 얘기다.


    서울 강남에 살고 있는 주부 이모(45)씨는 "금고 속에 현금, 금괴, 결혼 예물, 고가의 손목시계 등 값나가는 물건들을 넣어두는 이웃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미국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북한 관련 리스크가 부각되고 이에 따른 불안감이 커지면서, 금융 상품보다 현금에 대한 선호가 높아진 것 같다"고도 했다.


    ◇일본식 '장롱 예금' 현상…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조세 회피


    가계가 집에 돈다발을 쌓아두는 현상을 일본에선 '장롱 예금'이라고 불러왔다. 은행 등 금융기관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보관하는 돈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장롱 예금 규모는 작년 말 43조2000억엔을 돌파했다. 고액권인 1만엔권 수요도 급증했다. 마이너스 금리. 세금 징수 강화, 자산 관련 정보 공개 확대와 향후 경기에 대한 우려가 현금 선호의 주된 요인으로 풀이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40대 변호사 김모씨는 100만원이 넘는 결제도 반드시 현금으로 한다. 단골인 식당이나 술집에선 월말에 현금으로 한꺼번에 계산한다. 그는 "예금 금리나 투자 수익률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굳이 세원(稅源)을 노출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서울의 유명 백화점 지하에 있는 수퍼마켓에선 식료품 수십만원어치를 사면서 꼬박꼬박 현금으로만 계산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지하경제에 대한 세금 징수를 강화하자, 5만원권 환수율이 60%대에서 20%대까지 급락하기도 했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일본에선 '장롱 예금' 확대가 중산층 이상의 소비 축소와 동시에 생겼던 현상"이라며 "우리나라에서도 가계의 현금 선호가 소비 위축을 동반한다면 경제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