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도 한국 떠난다, 작년 6조8700억 해외로

    입력 : 2017.04.17 09:13

    [중기發 제조업 공동화] [1] 화학·금형·전자 동시 탈출


    - 국내 채용 줄이고 해외에 공장
    대기업 해외 진출로 하청 줄고 인건비 부담·각종 규제는 늘어
    反기업 정서도 이전 부추겨


    - 근로자 88% 고용하고 있는데…
    제조업 취업자 매달 수만명 감소… 2~3년 뒤 엄청난 후폭풍 우려


    지난달 30일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자동차 금형(金型) 제조업체 D사. 5000㎡(약 1500평) 규모 공장에서는 직원 40여 명이 철과 알루미늄을 거대한 절삭기로 잘라내고 있었다. 이 회사는 최근 태국 현지 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2012년 체코에 이어 2번째 해외 공장이다. 해외 진출에 나서면서 5년째 국내 공장 직원 수는 한 명도 늘지 않았다. 이 회사 강모 대표는 "직원 대부분이 50~60대"라며 "젊은 신입사원을 구하기도 어려운 데다 최저임금 인상 등 인건비 부담만 커지다 보니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는 중견·중소 기업들이 한국 땅을 떠나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 동남아 등지로 제조기지를 대거 옮긴 데 이어 중소기업들 사이에서도 한국을 등지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산업단지 곳곳에 빈터 - 경기도 시흥시 '시화 멀티테크노밸리(MTV) 국가산업단지'에 2년째 빈터로 남아 있는 공장 부지. 지난달 30일 찾은 이 산업단지에는 이런 빈 부지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최근 1~2년새 국내 중소기업들이 해외로 나가면서 국내 설비투자를 줄일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박상훈 기자


    16일 한국수출입은행 집계에 따르면 국내 중소기업들이 작년 한 해 동안 해외에 투자한 금액은 총 60억2300만달러(약 6조8700억원)로 해당 통계를 작성한 1980년 이래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해외 법인 설립도 1594개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가장 많았다. 한국수출입은행 관계자는 "최근 3~4년 동안 중기의 해외 법인 설립과 투자 금액이 계속 늘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의 탈(脫) 한국 러시가 가속화되는 것은 대기업의 해외 진출로 국내 하청 물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데다 가중되는 인건비 부담과 각종 규제 강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의 관계자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반(反)기업 정서도 해외 이전을 부추기는 큰 요인"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에 이어 중소기업마저 떠나면서 국내 고용 기반이 붕괴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중소기업은 국내 근로자의 88%(1402만명)를 고용하고 있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원장은 "기업이 해외에 공장을 지으면 국내 공장은 시설 투자를 줄이거나 기존 공장 규모도 결국은 축소하게 될 것"이라며 "2~3년 뒤에는 중소기업발(發)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업종 불문 진행되는 해외 이전


    중소기업의 해외 이전은 화학, 금형, 전자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의류, 봉제완구, 신발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 위주였던 과거와는 다른 양상이다.


    대표적인 중기 업종으로 꼽히는 전자회로기판(PCB) 업계는 '산업 공동화(空洞化)' 우려까지 나온다. PCB는 스마트폰, TV, 세탁기 등 모든 전자 기기에 들어가는 필수부품이다. 800여 개 중소기업이 전성기를 누리며 한때 생산 규모는 15조원을 웃돌았다. 하지만 지난 3~4년간 영풍전자·인터플렉스·비에이치·심텍·이수페타시스·에스아이플렉스 같은 주요 업체들이 줄줄이 베트남과 중국에 생산공장을 차렸다.


    한 업체 대표는 "국내에 앉아서 주문을 기다리다가는 망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며 "자금 여력이 있는 업체들은 다들 대기업이 진출한 해외 공장 주변 부지를 알아보러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이 해외로 주요 공장을 옮긴 데 이어 시차를 두고 동반 이전하는 것이다. 이 바람에 국내 PCB 업계의 전체 생산 규모는 지난해 12조원대로 주저앉았다.


    충청북도에 본사를 둔 화학물질 제조업체 K사는 최근 임원 회의에서 동남아에 공장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해외 공장이 궤도에 오르면 연구 인력만 국내에 남기고 2개 공장 설비를 통째로 해외로 옮기는 방안까지 고려하고 있다. 해마다 매출 400억원에 영업이익 60억원 안팎을 거두는 우량기업이 해외로 고개를 돌린 이유는 규제였다.


    이 회사 고위 관계자는 "내년 7월 화평법(화학물질등록평가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화학업체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며 "우리처럼 해외로 공장 이전을 준비하는 곳이 한둘이 아니다"고 말했다. 화평법은 510종의 화학물질을 환경부에 의무적으로 등록하게 하는 규제다. 이 관계자는 "한 가지 물질에 대해 안정성 테스트를 하고 등록하는 데까지 1억~2억원은 들기 때문에 중소기업은 감당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해외로 주력 옮기며 국내 인력 감축 현실화


    해외 이전으로 인한 국내 고용 감축 우려도 현실화하고 있다. 디스플레이용 유리기판을 세정하는 장비 시장에서 세계 1위인 DMS의 국내 인력 규모는 5년 전 600여 명에서 200명으로 축소됐다. 반면 중국 웨이하이(威海) 공장에는 1600명 이상의 현지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국내 대기업에 납품하는 장비도 중국 공장에서 생산해 한국으로 들여오는 상황"이라며 "중국 공장이 전체 생산의 90% 이상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전체 취업자 수는 올해 들어 부동산·건설·소매업 등 내수 업종의 호조로 늘었지만, 제조업 취업자는 지난해 7월 이후 올 3월까지 9개월째 매달 수만명씩 줄고 있다. 제조업종 중 고용인원이 가장 많은 전자부품·컴퓨터·통신장비 분야는 39개월 연속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4년 1월 56만7000명에 달했던 해당 업종 고용 규모는 이제 51만6000명까지 줄었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경제학)는 "국내 인력 고용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가 해외로 나가는 중기들이 늘어난다는 점"이라며 "4차 산업혁명을 통해 중소기업 국내 공장의 생산성과 효율을 높이지 못하면 엄청난 후폭풍이 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