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4.06 16:02
- ▲ 이준수 시간과 기억 심리치료센터 소장
근래 들어 심리적인 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내용의 기사들이 연일 보도 되고 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부터, 발표불안, 특정공포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심리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기사에 등장한다. 그 중에는 이런 심리적 질환을 제때 치료받지 못해 범죄로 이어진 사례들도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낸다. 요즘과 같이 심리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보도되고, 그들이 가진 질환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때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아지는 분야가 있다. 바로 심리학과 심리치료이다. 심리학적으로 그 사람들이 어떤 심리 상태이고, 어떤 심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지에 대해 필연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리학과 심리치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될 때면 항상 등장하는 절대적인 이름이 하나 있는데, 바로 프로이트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856년에 출생하여 1939년에 사망한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이다. 프로이트는 심리적 질환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발견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이라는 매우 효과적이고 놀라운 치료기법을 탄생시켰고, 이후에 심리학과 심리치료에서 매우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인들의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전문적인 지식 또한 늘어나면서 이렇게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던 프로이트가 잘못된 비판에 노출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어느 정도의 심리학적 지식을 갖춘 일반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프로이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인터넷이나 SNS 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프로이트에 대해 비판을 하는 글들을 찾아볼 수 있다.
대개 프로이트의 이론과 치료법이 과학적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으며, 그가 주장한 '무의식'이라는 개념도 심리학자들의 최근 연구결과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 프로이트를 향한 비판들의 주요 논지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거들은 대부분 심리치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부 실험심리학자들이 하는 주장들을 그대로 가져온 것들이다. 심리학자들은 크게 세 분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사회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처럼 실험심리학 계열이고, 또 하나는 상담심리학과 임상심리학처럼 심리치료 계열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최근에 생겨난 다양한 분야들을 심리학적으로 접근해서 연구하는 응용심리학 계열이다.
이렇게 심리학 분야가 각기 다른 분야와 계열들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심리학 학부 과정에서는 심리학 개론 과목을 개설해서 심리학의 역사와 다양한 심리학 분야들을 배우게 한다. 서로 많은 차이를 보이는 심리학의 분야들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길러줘서 균형 있는 심리학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많은 심리학도들이 이 심리학개론 수업은 소홀히 하고 자신이 연구하고 싶은 분야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심리학자로 성장한 이후에 균형 잡힌 심리학적 지식을 갖추지 못한 채로 자신의 전공 이외의 다른 심리학 분야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일부 실험심리학자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과학적이며 심리학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심리학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이들이 프로이트를 비난하는 근거에 많은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다.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철학에서부터 분화가 된 학문이다. 그리스 로마시대 때부터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흐름이 있어왔는데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독자적인 학문으로 분화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가지 학문들이 발전을 하는 분위기 속에서 빌헬름 분트라는 심리학자가 등장하면서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빌헬름 분트는 과학적이고 증명 가능한 방법을 통해 인간의 정신활동을 연구하려고 했는데, 매우 큰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전까지는 인간의 정신활동과 심리적인 변화에 대해서 관찰 가능한 방식으로 연구를 했던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통해 연구를 해야할 지가 분트의 최대의 과제였다. 인간의 정신과 마음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 3자가 직접적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분트는 철학의 연구방법을 빌려 내성법이라는 방법으로 인간의 정신활동과 심리를 관찰하려했다. 분트가 사용했던 내성법은 외부의 물리적 자극에 따른 정신적 활동과 심리적 변화를 피실험자가 스스로 자기보고를 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분트로서는 고심 끝에 선택한 방법이었지만 내성법은 피실험자의 말에만 의존하는 매우 주관적이고 일관적이지 않은 방법이었기 때문에 결과 또한 신뢰할 수 없었다.
분트가 내성법을 통해서 심리학을 연구하고 있을 무렵,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앞서 언급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이미 신경과 의사로 많은 히스테리 환자들을 접하고 치료하면서 수많은 임상적 경험을 한 상태였다. 즉, 프로이트는 경험과학적인 방법들로 무의식과 기타 정신병리에 대한 자신만의 이론을 구축한 상태였기 때문에, 분트의 방식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프로이트는 자신이 만든 정신분석은 심리학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심리학적 연구방법론의 수준으로는 신뢰할 수 없고 엉뚱한 결과들만이 도출되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심리학을 엉터리같은 학문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정신분석과 심리학에 선을 긋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이후에 심리학적인 연구방법론들이 많이 발전을 하고 나서는 프로이트도 미국 심리학회의 초대에 응해 강의를 하는 등 심리학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태도가 매우 누그러진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결과 후대에는 심리학계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분트의 과학적인 시도 또한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후대에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뛰어난 연구 결과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즉,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르네상스 시대 이후 심리학은 분트의 실험과학적인 방법론과 프로이트의 경험과학적인 방법론에 모두 영향을 받아 큰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학이란 학문의 특징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근 인지신경과학의 움직임이다. 인지신경과학은 뇌와 뇌신경 연구를 통해 뇌와 인지, 행동의 관계를 밝혀내는 심리학의 한 분야로 인지신경심리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인지신경과학은 기본적으로 분트의 실험과학적인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다. 때문에 여러 가지 뇌영상 관측장비들이나 뇌파 측정기 등의 다양한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장비들을 동원해서 뇌의 작용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관측하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최근에 인지신경과학 분야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 대한 경험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인정하고 이를 인지신경과학의 영역에서 다루려는 시도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인지신경과학자들이 분트와 프로이트 모두에 대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못했을 일이다.
앞서 언급한 잘못된 비판들이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생긴 것이었다면, 정신분석의 치료적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정신건강 영역의 전문가들인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정신분석이 심리적 질환에 대한 치료 효과는 없고 학술적인 목적이나 자기탐색의 과정으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정신분석의 치료 원리와 역사를 이해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오해에 불과하다. 프로이트는 실제로 정신분석을 통해서 수많은 트라우마 환자들을 치료했고 그 와중에 트라우마라는 개념 자체를 정립했다. 이는 프로이트와 관련된 전문 서적들에도 대부분 기술이 되어 있는 내용이다.
정신분석에서는 무의식에 잠겨 있는 고통이나 상처 문제들을 의식의 수면 위로 서서히 끌어올려 표출을 시켜서 치료를 한다. 그 과정에서 두 가지 치료 효과가 발생하는 데 하나는 감정의 표출, 즉 카타르시스의 발생이고, 또 하나는 통찰이다. 만약에 정신분석이 치료적인 효과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정신분석과 같이 감정의 표출과 카타르시스의 발생을 치료적 원리로 공유하는 미술치료나 사이코드라마도 효과가 없어야만 한다. 미술치료와 사이코드라마는 정신분석의 이런 감정 표출을 통한 치료적 원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만들어진 치료법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에도 미술치료나 사이코드라마가 치료적 효과가 뛰어나다는 수많은 객관적인 연구 결과들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의 치료 효과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미술치료나 사이코드라마에 대해서는 그 효과를 인정하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역설적이게도 미술치료와 사이코드라마의 모태가 되는 정신분석은 치료 효과를 부정 당하는데 반해, 정신분석에서 파생된 미술치료와 사이코드라마는 치료 효과를 인정받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게 된 셈이다.
이렇게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 이유에는 정신건강 전문가들의 개인적인 경험이 크게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간혹 다른 정신건강 전문가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다 보면 정신분석을 실제 치료현장에서 활용해봤는데 별 효과가 없더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들은 대부분 정신의학자나 인지치료자들로서 수련과정에서 정신분석의 기초적인 기법들을 배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수련과정 중에서 정신분석적 기법을 훈련받는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다. 정신과 전문의는 의학적 진단 능력과 생물학적 처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훈련을 훨씬 많이 하고, 인지치료자 또한 인지치료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한 훈련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한다. 자신들이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분야는 따로 있는데, 정신분석에서 그 결실을 맺고자 하는 것은 매우 모순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인지치료자들이나 정신과전문의들에게 정신분석의 기초를 가르치는 이유는 정신분석이 심리치료 기법 중에서 가장 보존적이고 허용적인 치료법이기 때문이다. 정신건강 전문가로서 마음이 아픈 환자들과 내담자들을 대할 때 기초적인 정신분석적 기술들을 사용한다면 마음의 안정을 쉽게 가져다줄 수 있고, 치료적 관계 형성에서도 매우 도움이 된다. 즉, 정신건강 전문가로서의 기본 태도와 자세를 체득화 시키려는 목적으로 정신분석의 기초를 훈련시키는 것이지, 정신분석을 전문적인 치료법으로 적용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닌 것이다.
정신분석을 전문적인 치료기법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만을 매일같이 최소 6개월 이상 훈련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선다. 정신과 전문의들과 인지치료자들에게는 수련과정 중에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여유가 없으니 정신분석적인 원리를 완벽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정신과전문의이면서 정신분석가인 치료자들의 이력을 조금만 살펴보면 의무적인 의학적 수련과정을 마치고 이와는 별개로 정신분석적 전문 수련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혹 인지치료자들 중에는 아예 정신분석에 대한 치료경험이 전혀 없고, 정신분석을 훈련 받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논리는 프로이트의 우울이론이 잘못되었음이 이미 밝혀졌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분노와 우울은 같은 감정의 다른 표현이라고 이론적으로 정립을 해놓았는데, 이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삼는 것은 인지치료의 창시자인 아론 벡의 연구이다. 아론 벡은 본래 정신분석가였던 인물로 앞서 말한 프로이트의 우울이론을 증명하려는 연구를 했다. 아론 벡의은 분노와 우울이 같은 감정이라면 결국 우울한 사람의 내면에는 분노 감정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연구 결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노 감정이 없었고 이에 아론 벡은 정신분석과 결별하고 인지치료를 창시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 아론 벡의 연구가 프로이트의 우울이론과 정반대의 결과를 도출해낸 것은 벡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벡은 정신의학적인 진단 기준(DSM)으로 우울장애의 양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때문에 프로이트의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트의 우울이론은 우울과 분노라는 감정은 표면적인 양상의 차이이고 그 안에는 공격성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는 이론이다. 즉, 내가 어떤 부정적인 환경의 자극에 노출되어 있을 때, 그 자극은 나의 내면에 공격성이란 형태로 들어오게 된다. 그것이 타인이나 세상과 같이 외부로 표출되면 분노 감정이 되는 것이고, 자신에게 내부로 향하게 되면 우울 감정이 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같은 부정적인 자극을 받더라도 외부로만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도 있고, 내부로만 침잠해서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또한 어떤 때는 극단적인 분노를 표출하다가도 어떤 때는 극도로 우울해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우울이론이다.
그런데 아론 벡은 공격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고 프로이트가 우울과 분노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우울의 양상과 분노의 양상은 다르다. 그 근원이 되는 공격성이란 것이 같을 뿐이다. 그러니 우울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분노라는 양상이 들어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물론 아론 벡의 오해로 인해 후대 치료자들을 인지치료라는 아주 강력한 무기를 하나 더 얻을 수 있었다. 기존에 있었던 정신분석도 매우 훌륭하고, 그 내용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한 사람의 내면과 무의식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론이다. 하지만 인지치료는 정신분석보다 더욱 빠르게 내담자와 환자들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매우 놀라운 효과를 지닌 치료법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벡이 프로이트를 오해한 것이 프로이트 개인의 명성에는 해가 되는 일이었겠지만 심리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치료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오히려 행운이었던 것이다.
벡이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인지치료를 새롭게 창시했지만, 인지치료와 정신분석을 모두 이해하고 나면 이 두 치료법이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앞서 언급한 정신분석의 주요 치료 원리 중 하나인 통찰은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욕구를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지치료에서 비합리적인 신념, 역기능적인 사고를 다루는 것과 비슷하다. 잘못된 자신의 생각이나 오해를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인식하게 하고 스스로 수정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지치료의 소크라테스식 질문도 정신분석의 자유연상, 개방적 질문과 유사성을 보인다. 우리의 무의식은 답을 알고 있다는 정신분석의 전제나 내담자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인지치료의 전제가 모두 일맥상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것 같은 두 대상들이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유사한 점들을 보이기도 한다. 경험과학으로서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실험과학으로서의 분트의 후예들은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탐구한다는 면에서는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고, 서로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보완해 주는 역할도 한다. 정신분석과 인지치료 또한 마찬가지이다. 정신분석은 과거와 원인적인 사건을 중시하고, 인지치료는 현재와 결과적으로 갖게 된 비합리적이고 역기능적인 사고를 중시하기에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치료한다는 점에서, 심리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치료해준다는 점에서 그 둘의 입장은 같다. 기법적으로도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통합적으로 활용하면 서로를 보완해 줄 수도 있다.
때문에 날을 세워 상대방을 비판을 하고 부정하려고 하기보다는 서로와 서로의 위치를 인정하고 협력과 교류를 통해 같이 발전을 해나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현재 알지 못하는 우리 마음의 무한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그러다 보면 지금 현재 마음이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좀더 효과적으로 치료해주고 더욱 빨리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