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호의 한국의 명품문화 - 3] 조선의 선비와 일본의 무사

  • 국립목포대 하중호 초빙교수

    입력 : 2017.03.10 16:13

    국립목포대 하중호 초빙교수

    조선의 선비와 일본의 무사 사무라이는 목적을 관철하는 수단과 방법이 다르다. 무사는 칼로 승패를 가렸고 선비는 붓으로 시비를 가렸다. 따라서 일본인은 조선선비들이 시비를 이념적 명분으로 논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선비의 목표가 학문을 닦고 벼슬에 나아가 임금을 보필하는 것이라면, 무사는 칼로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공과로 주어지는 땅의 주인(영주)이 되는 것이었다. 이같이 주군과 무사는 일종의 계약관계로 주군에 대한 윤리적 충성의식은 그리 높지 않았다. 모시던 주군을 바꿔 다른 주군을 모실 수 있는 권리와 심지어 주종의 계약관계를 지키지 않는 주군을 제거하는 하극상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 선비와 상이한 성격의 무사가 언제부터인가 선비와 유사하게 변모하였다. 이는 16세기 후반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가 된 강항 등 조선유학자들이 성리학을 전파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삼으면서부터이다. 그때까지 칼만 알았던 일본의 무사가 붓의 세계를 알게 된다. 이것이 후기 무사도의 시발이다.


    이렇게 탄생한 무사도라는 단어가 선비사상보다 서양에 먼저 알려진 것은 19세기말 '니토베 이나조(일본화폐 오천엔 권의 초상화)'가 세련된 영어로 저술한 'BUSHIDO(武士道,The soul of Japan)'이다. 그의 무사도를 보면 충효와 명예를 지키고, 스스로 엄해야 한다는 등 선비의 기본정신과 일치한다. 그는 무사도를 해외에 소개했고, 일본에서는 새로운 무사도 붐이 시민의식으로 고조된다. 그는 무사도를 일본인의 윤리와 사무라이 사상의 핵심이라고 포장하였다. 이로써 칼의 이미지와 야만의 나라가 아닌 아시아의 교양 있는 문명의 나라로 서양에 알려진다. 이같이 조선성리학이 일본을 일약 문화의 나라로 만들었다. 한데 성리학이 가르쳐 준 충효사상 중 충(忠)이 일본에서 환영받았다. 사무라이가 부모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기록은 별로 없으나, 주군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충의 사례는 후기 무사시대에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그들은 가슴 속에 칼이 숨어 있었고, 청일 러일 태평양전쟁 등 도발을 감행할 때마다 이를 정당화할 명분으로 성리학을 이용했다. 조선 선비로부터 성리학을 배운 사무라이가 역설적으로 그 성리학적 명분을 내세워 침략을 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지구촌의 선진국 대부분은 근대화시대에 국가통사를 다시 써 정비했으나, 한국은 자신의 통사를 스스로 쓰지 못하고 일제의 손으로 쓰게 되는 불행을 겪었다.


    그들은 선비정신도 부정적으로 폄하하며 초등교과서에까지 올려 강제로 가르쳤다. 한편 그들은 근대정부를 세운 주류세력이 무사도를 일본의 가치관으로 승계한데 반하여 우리는 광복 후 정치적 혼란과 서구사상의 밀물 속에 선비사상이 가치관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제 무사도는 일본의 심벌이 되었지만, 한국에는 그런 것이 없다. 한류가 날로 인기라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고급이미지가 뒤따라야한다. 그런 한국인의 정체성과 고급문화가 한류의 지속과 국격의 상승에도 기여할 것이며, 이것이 버려진 선비정신의 복원이 시급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