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호의 한국의 명품문화 - 2] 군왕과 조선왕조실록

  • 국립목포대 하중호 초빙교수

    입력 : 2017.02.09 09:55

    국립목포대 하중호 초빙교수

    기록문화는 학문과 지식의 보고이며 지혜와 문화의 소산이다. 유네스코의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세계가 놀라는 우리나라의 훈민정음(해례본), 군왕도 못 본 500년 조선왕조실록,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 등 어느 것을 보아도 전쟁의 유물이나 백성을 괴롭힌 흔적이 아닌 민족의 문화수준을 말하는 자랑스러운 유산들이다. 100만 백성의 피와 원성인 만리장성이나, 10만 백성을 20년이나 혹사한 피리오의 무덤인 피라미드 같은 대형 유적과는 확연히 차별화된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인간의 지혜와 백성을 위한 지도자의 리더십까지 엿보이는 귀중한 역사서이며, 역사만큼이나 많은 일화가 전해져온다.


    조선의 임금 곁에는 항상 사관이 있었다. 인조대왕은 사관이 사사건건 쫓아다니는 것이 싫어서 하루는 대신들에게 "저 방에서 회의할 것이야"라며 사관을 따돌렸다. 사관이 마마를 놓쳤지만 지필묵을 싸들고 곧 찾아왔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느냐"며 짜증을 냈지만, 사관은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대로 적었다. 인조는 사관이 괘씸하여 후일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양을 보냈다. 그랬더니 다음에 온 사관이 또 그 사실을 적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다. 사관은 종7품~종9품사이로, 지금 제도로 보면 높아야 사무관정도일 것이다. 그 정도의 직급이 감히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적었고, 급히 흘려 적은 것을 정서한 것이 '사초'이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편찬위원회가 구성되고 4부가 출판되었다. 4부정도 라만 사람이 직접 쓰는 것이 보다 경제적이겠지만,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큰 비용을 들여 굳이 목판이나 금속활자 본을 만들었다.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이 탄생하였다. 이처럼 힘들여 탄생한 것일지라도 문제는 공정한 기술 여부일 것이다.


    세종이 등극 후 아버지 태종의 실록을 보고 싶었다. 맹사성이 간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보시면 사관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기술을 못합니다." 세종이 참았다. 몇 년 후 또 보고 싶어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거울삼아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며 보고자하였다. 이번에는 황희 정승이 나섰다. "마마께서 보시면 다음 왕도 또 다음 왕도 보려 할 것이니, 마마께서 보지 마시고 다음 왕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이것을 세종이 들어주었다. "네 말이 맞다.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고 누구도 볼 수 없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해 보았더니,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문제는 왕도 못 보니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다. 힘들게 왕의 행적과 모든 정치상황을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간 쓰다니 누구를 위하여 또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인가? 이것은 백성을 위하여 임금과 신하들이 합리적인 정치를 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고, 바른 왕도와 리더십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당파싸움만 하다 500년 만에 망한 조선이 아니라, 세계에 유래가 드문 500년이나 유지한 대단한 왕조의 노하우가 여기에 있다. 군왕도 못 본 책, 조선왕조실록은 한국만의 것이 아닌 세계에 사례가 없는 인류의 보물이며 기록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