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세점, 덩치 커야 살아남는다

    입력 : 2017.02.03 09:38

    서울 사업자 13곳으로 늘었지만 명품·상품 구색 갖춘 곳에만 몰려
    90년대 초처럼 줄줄이 폐업 우려


    '5년 한시법' 개정하고 면세점 옥석 가리기 시작해야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SM면세점은 한산했다. 춘제(春節·중국 설) 연휴 마지막 날이지만 2층 화장품 코너에는 설화수·후 등 국산 제품을 구입하는 중국 관광객 등 10여명이 전부였다. 중구 장충단로 두타면세점 상황은 더 나빴다. 고급 시계·액세서리 매장에는 손님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1조원대 매출을 올리겠다며 개장한 신규 면세점들이 지난해 수백억원에서 2000억~3000억원대 매출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HDC신라와 신세계DF, 한화갤러리아, 두타, SM면세점이 모두 수백억원대 적자를 기록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던 시내 면세점이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이 불가피한 '레드 오션'으로 바뀌고 있다. 2015년까지 6곳이던 서울 시내 면세점은 정부가 사업권을 늘리며 지난해 9곳으로 늘었고, 올해는 13곳까지 확대된다. 한정된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불붙으면서 면세점들이 고객을 데리고 온 여행사 등에 지급하는 송객 수수료는 지난해 1조원대에 육박했다.


    ◇손님 유치 수수료만 1兆원…제 살 깎아 먹기식 경쟁 가속화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22개 시내 면세점 사업자가 지불한 송객 수수료는 9672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71.7% 급증했다. 전체 시내 면세점 지난해 매출(8조8712억원)의 10.9%에 달한다. 면세점 관계자들은 "고객을 끌어모을 명품 브랜드를 유치하지 못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일부 신규 업체는 매출의 40% 이상을 송객 수수료에 쏟아붓는다"며 "정부가 면세점 사업권 심사 기간을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한 '5년 한시법'이 시행되고 사업자가 대폭 늘면서 예견했던 사태"라고 말했다.


    지난 31일 서울 중구 동화면세점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들어가고 있다. 국내 최초 면세점인 동화면세점은 호텔신라에 경영권을 넘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업계에서는 최근 동화면세점이 호텔신라에 경영권을 넘기려는 상황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고 있다. 1979년 국내 최초의 시내 면세점으로 문을 연 동화면세점은 롯데·신라면세점과 함께 루이비통·에르메스·샤넬 등 3대 명품 브랜드를 유치하며 경쟁력 있는 중견 면세점으로 30여년간 영업해 왔다. 지난해에는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인 3500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동화면세점 관계자는 "2013년 호텔신라에 주식 19.9%를 600억원에 매각하면서 3년 안에 주식을 다시 매입하지 못하면 담보로 맡긴 김기병 회장의 지분 30.2%를 호텔신라에 넘기는 계약을 맺었다"며 "김 회장이 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경영권을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호텔신라 측은 경영권 인수 대신 김 회장이 채무를 갚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점차 불투명해지는 면세점 업황 등을 감안해 양측이 모두 면세점 사업을 확장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면세점업계 인수 합병으로 몸집 키우기 불가피"


    한 면세점 관계자는 "최근 상황을 보면 줄줄이 면세 사업권을 반납하던 1990년대 초반 상황이 재연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외국인 쇼핑 활성화를 명분으로 내걸고 문턱을 낮추자 면세점이 29개까지 늘었지만, 이후 줄줄이 폐점하는 구조조정 과정을 겪어야 했다. 면세점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5년 한시법'을 개정하고 규모의 경제 효과를 볼 수 있는 옥석 가리기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면세점은 덩치 큰 업체가 최고급 명품과 다양한 상품을 확보하고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더 많은 손님을 유치하는 '규모의 경제' 효과가 나타나는 산업이다.


    세계 1위 면세점 기업인 스위스의 듀프리는 2014년 미국 월드듀티프리(WDF)를 인수하면서 2위 DFS와 격차를 더 벌렸다. 중국은 하이난섬에 세계 최대 규모 면세점을 세우고 아시아 관광객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서용구 숙명여대 교수는 "면세점 사업을 재벌 대기업의 독과점으로 보는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글로벌 시장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며 "장기적으로 국내 면세점들이 업체 간 합종연횡이나 인수·합병(M&A)을 통해 '체급'을 높여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