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호의 한국의 명품문화 - 1] 대명절 설, 서러워 설인가?

  • 국립목포대 하중호 초빙교수

    입력 : 2017.01.25 10:27

    국립목포대 하중호 초빙교수

    설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이다. 한때는 조상의 차례나 모시는 날쯤으로 격하되고 신정(新正)의 위세에 밀려 구정(舊正)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지만, 이제 '설'의 본이름을 되찾고 고유명절의 전통과 명예회복, 민족 대명절의 자리로 복귀하였다.
    설은 5대 명절(설, 한식, 단오, 한가위, 동지) 중 하나로 그 해의 첫날이라는 뜻에서 원일(元日)이라 하고, 설날 아침을 원조(元朝) 혹은 원단(元旦)이라고도 말 한다.


    설날의 명칭과 유래는 확실한 정설은 없으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새해 첫 날이라 낯이 설어 설날이라 했다는 이야기와 나이 먹기가 서러워 설날이라 했다는 설(說)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뭔가 흡족하지 못하다. 봄의 시작을 봄이 선다는 뜻으로 입춘(立春)이라 말하고, 가을의 시작을 입추(立秋)라 말하듯이 '한 해가 새로 시작하는 날'이므로 한해가 새로 서는 날이라는 뜻으로 입세(立歲) 혹은 입세일(立歲日)에서 '설'이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후학들의 견해가 어쩌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설은 크게 차례(茶禮)와 세배(歲拜)로 상징된다. 조상에 대한 차례와 어르신께 드리는 세배는 우리의 고유 미풍양속이다. 시절음식은 떡국이요 한과는 강정일 것이다.
    떡국의 떡가래는 마음대로 늘어나니까 이처럼 수명도 늘어나라는 의미에서 떡국을 해 먹었다고 하며, '떡국 몇 그릇 먹었느냐'로 나이를 세기도 하였으니 떡국이야말로 진정 설의 대표음식인 셈이다. 전통 놀이문화로는 연날리기, 제기차기, 널뛰기 등 겨우내 움츠렸던 하체의 건강을 위한 것들이 민속으로 많이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을 보면 선조들의 지혜가 놀라울 뿐이다.


    설날의 풍속에는 반듯이 그 전날인 섣달그믐의 풍속을 알아야 한다.
    본시 송년(送年)이나 망년(忘年)이란 말은 없었으며 섣달 그믐날을 수세(守歲) 혹은 제석(除夕)이라 하여 집안 곳곳에 등촉을 밝히고 한 밤을 꼬박 지새웠다.
    가는 세월이 너무 아쉬워 밤의 시간을 붙잡고자 안방 건넌방은 물론 화장실이나 우물, 심지어는 묘소의 작명 등에 까지도 곳곳에 불을 밝혔다. 아이들에게는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겁을 주었고, 그래도 잠에 취해 어쩔 수 없이 자는 아이에게는 눈썹에 흰 분이나 밀가루를 발라 희어졌다고 놀려주기도 하였다.
    한편 크리스마스이브에 양말에 선물을 받는 서양의 풍습이 있듯이 우리 아이들은 그믐에 신발을 안고 자는 민속이 있었다. 이는 야광귀(夜光鬼)라는 호기심 강한 귀신이 아이들 신발을 밤에 신어보고 맞는 신발의 주인에게 병을 준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문 앞에 채나 얼게미를 걸어놓아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호기심 많은 야광귀가 그 채의 구멍을 세다가 날이 밝으면 신을 신어보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설 전날을 까치설이라고 한 것은 몇 가지 속설이 있으나, 까지가 길조로 반가운 소식을 가져온다고 믿는데서 붙여진 것으로 본다. 누구나 희망찬 새해를 기대해서 일 것이다.
    그 외에도 설날에 징과 북을 치고 때로는 폭죽을 터트리며 경쾌하게 온 마을을 순회하던 농악대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선하다. 이는 새해에 액땜을 하고 풍년과 행운을 축원하는 행사이기도 하였다. 점차 사라져가는 민속들이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