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된 주택채권... 지금도 4억 집 사면 22만원 떼가

    입력 : 2017.01.20 09:29

    [주택구입자 부담 주는 국민주택채권… 폐지 목소리 커져]


    - 채권 구경도 못하고
    부동산 등기하려면 무조건 사야
    수천만원 목돈 여유 없는 시민들, 대부분 은행에 손해보고 되팔아


    - 주택기금 36兆나 쌓여 있는데…
    작년에도 15兆 넘는 채권 강매, 국토부는 "개선 계획 없다"


    회사원 A씨는 얼마 전 4억원짜리 집을 사면서 공인중개사에게 "'국민주택채권'을 1040만원 정도 사야지 등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집을 사려고 온갖 데서 돈을 탈탈 긁어모았던 A씨가 "그 큰돈을 당장 구할 방법이 없다"고 하자 공인중개사는 "원래 집을 살 때 나라에서 파는 채권을 의무적으로 사야 하는데 대부분 바로 은행에 할인해서 되판다. 현금 필요할 때 상품권 좀 손해 보고 파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고, 할인하는 금액과 매매 수수료 합쳐서 몇십만원만 준비하시라"고 설명했다.


    A씨는 왜 이런 채권을 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채권을 사지 않으면 등기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22만원 정도를 내고 등기를 마쳤다. A씨는 "실제로 채권을 본 적도, 그 채권이 어디 쓰이는지 알아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주택 구입자에게 강매하는 국민주택채권이 국민에게 불합리한 부담을 지우는 낡은 제도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민주택채권 강제 매입은 한국의 자본시장이 성숙하지 못하던 1970년대에 정부가 분양 주택이나 임대 주택을 건설하는 등 주택 관련 사업의 자금 조달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다른 나라에선 찾기 어려운 제도다.


    ◇주택채권 '강매' 2010년 9조원→2016년 15조원


    얼마 전 서울 문래동의 아파트를 구입한 B씨는 "부동산 거래 당일에서야 채권을 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왜 사고 싶지도 않은 채권을 떠안아서 수십만원을 손해 봐야 하냐고 항의했더니 법무사가 '그럼 되팔지 말고 예금 든 셈치고 가지고 있으라'고 설명을 하더라. 예금 들 여유도, 계획도 없어 그냥 몇십만원 내고 채권을 은행에 넘겼다"고 말했다. 은행이 이렇게 사들인 채권(금리 연 1.75%)을 지정된 증권사로 넘기면, 증권사는 이 채권을 보유하거나 채권시장에 내다 판다.



    국토부 및 금융투자협회가 집계한 결과 이렇게 국민에게 '강매'한 국민주택채권의 규모는 2008년 8조4747억원, 2010년 8조9391억원, 2012년 9조7357억원, 2014년 12조4353억원에서 지난해 15조5252억원으로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매매가 많아지고 가격도 올라가면서 부동산 가격에 비례해서 사야 하는 채권 규모도 가파르게 늘어나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규제개혁팀 문상은 연구원은 "은행 '꺾기'(대출을 해주면서 적금 가입 등을 강제하는 것) 같은 행태도 금융 당국에서 까다롭게 막는 시장의 환경을 감안하면, 한 해에 15조원이 넘는 채권을 국민에게 강제로 판매한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자본 시장 성숙, 강매 불필요"… 국토부 "개선 계획 없다"


    국민주택채권은 서울 개발이 한창이던 1973년 당시 주택은행이 정부 위탁을 받아 처음 발행했다. 1980년대에 발행 주체가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국토부의 요청을 받아 기재부가 발행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당시엔 웬만큼 돈이 많지 않고서는 '내 집 마련'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집을 살 만큼 여유가 있으니 사회를 위해 약간의 채권을 사라'는 취지로 주택 구입자들이 채권을 반드시 사게 했다.


    채권을 팔아서 조성된 돈은 국토부 산하 주택도시기금에서 관리한다. 임대 주택을 짓거나, 서민들에게 주택 구입 자금을 낮은 금리로 빌려주는 등 서민 주택 사업을 위해 돈이 쓰인다. 문제는 서민 주택 사업에 필요한 자금의 규모가 빠른 속도로 불어난 채권 판매액 규모를 따라가지 못해, 안 쓰고 남는 돈이 계속 쌓이고 있다는 점이다.


    채권 판매액이 늘어나는 가운데 주택 관련 사업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주택도시기금의 ‘여유 자금(쌓여 있는 돈 중에 해당 연도에 용처가 없어 주택·채권 등으로 운용하는 돈)’은 2000년대 초 1조2932억원에서 2015년 36조2500억원으로 28배 넘는 수준으로 불어났다. 이 여유 자금의 운용 수익률도 2.3%(지난해 3분기 기준)로 국민연금(약 4%) 등 다른 연·기금 수익률에 못 미친다. 금융소비자연맹 강형구 국장은 "이렇게 돈이 쌓여 있고 한국 자본시장의 '몸집'이 선진국에 버금갈 정도로 성숙한 상황에서 국민에게 준조세 성격의 국민주택채권을 계속 강매할 명분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부동산 경기가 식는 것처럼 시장 상황이 갑자기 나빠질 경우를 대비해야 하고 낡아 못 쓰게 된 도심 주택 환경 개선 등 새로운 사업도 계속 늘어나 서민주택 사업을 위한 여유 자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임대주택 지원에 쓰인 돈은 전체 주택도시기금 적립액의 8.1%이고, 투자를 늘리겠다던 도심 주거 환경 개선에 쓰인 돈은 0.2%에 불과하다. 남는 돈은 계속 '여유 자금'으로 쌓이는 중이다. 국토부 국정감사에서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제기됐고 기획재정부 등에선 국민주택채권을 다른 국채와 합쳐서 시장에서 발행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국토부는 손쉽게 한 해에 수조원을 조달할 수 있는 수단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