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풀고 일자리 만드는 정책... 與野 힘겨루기 대상 아니다

    입력 : 2017.01.04 09:38

    [한국 경제 새 길을 찾자] [3] 합의 바탕한 정책 결정 시스템


    - 영국·독일 등 선진국선
    중요한 경제 이슈엔 여야 없어 "의원들이 먼저 나서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 떨어진다" 인식
    - 한국선 정쟁의 희생양 전락
    규제프리존·서비스발전법 등 경제 혁신 정책 정치권이 발목 "사회적 합의 구조 中만도 못해"


    영국은 2012년 예산 30억파운드(약 4조5000억원)를 들여 국책은행인 '녹색투자은행(green investment bank)'을 세웠다. 대서양 편서풍이 강한 영국은 전 세계 풍력 발전소의 절반이 있는 '풍력 발전 대국'이다. 풍력 발전소를 해상에도 세워야 했는데, 건설비가 많이 들어 민간 자금만으론 부족했다. 그래서 '민영화' 기류가 강한 영국이지만 국책은행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해 그 결실을 맺었다.


    녹색투자은행 설립은 2009년 '지구의 친구들'이란 민간단체가 먼저 정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노동당 정부는 즉각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정치권이 먼저 움직였다. 그해 10월 자유민주당, 11월 보수당이 당내 위원회 등을 만들어 녹색투자은행 설립이 필요한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친환경을 내세우는 노동당 정부도 2010년 3월 녹색투자은행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하게 된다. 5월 총선에선 3당 모두 공약으로 내세웠다. 총선 승리로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 정부가 노동당 정권을 교체했지만, 녹색투자은행 정책은 서랍 속에 들어가지 않았고 오히려 속도를 내 2년 만에 은행 설립을 마쳤다.


    규제프리존특별법이 통과되면 산악 관광지로 개발될 강원도 대관령의 한 목장 전경. 강원도는 향후 산악관광 개발로 연간 200만명 이상이 이 지역을 찾아 약 200억원에 달하는 추가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강원도 제공


    독일에서 2009년 '균형 재정 원칙'을 헌법에 넣는 과정은 정치권이 주도했다. 이전까지 독일 헌법에는 '황금률'이라고 해서 경제에 심각한 교란이 없는 한 재정을 크게 늘리지 못하게 하는 취지의 조항이 있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 등이 조사를 해보니 1991~2005년 중에 불황이 아닌데도 국가 부채가 늘어나는 등 황금률을 어긴 경우가 7번이나 있었다. 이에 16명의 하원의원이 연석회의를 열었고, 헌법을 고쳐 2016년부터 균형 재정을 만들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독일 의원들이 왜 자발적으로 이런 일을 했는지 알아보니, '의원들이 먼저 나서야지 그러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 떨어진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정책 결정 장애병에 걸린 대한민국


    선진국에선 경제 정책 합의를 위해 정치권이 뛰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정치권이 정부가 내놓은 경제 혁신 정책의 발목을 잡고 있다. 2015년 12월 정부가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규제프리존특별법 같은 경우는 야당 도지사가 있는 지방단치단체도 환영하고 있는데, 야당 일각에서 '재벌 특혜'로 지목해 법안 처리를 반대하면서 제자리걸음이다. 여기에 정부마저 '최순실 사태'로 국정 추진력을 잃고 있어 지자체들만 애를 태우고 있다.



    규제프리존법은 전국 14개 지역에 27개 전략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내용이다. 강원도의 경우 법이 통과되면 대관령 삼양목장, 하늘목장 등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5000억원 이상을 투입해 산악 철도를 비롯한 관광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다. 강원도 내 민간단체들은 법 통과에 대비해 TF(태스크포스)팀까지 꾸렸다. 한 목장 관계자는 "지역 경제를 살리자는 법안이 왜 손가락질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2011년 말 국회에 처음 발의된 서비스발전기본법도 비슷한 신세다. 의료 영역 규제를 푸는 것을 놓고 야권과 시민단체가 "원격 의료를 허용하고, 나아가 의료 민영화로 가자는 것"이라며 반대하면서 지금껏 5년째 국회 문턱을 못 넘고 있다. 은산분리를 완화해 인터넷 은행에 IT기업을 끌어들이자는 은행법 개정안이나 거래소를 지주회사 체제로 개편해 국제 경쟁력을 키우도록 하자는 자본시장법 개정안도 모두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전문가들 "합의 바탕한 정책 결정 시스템 필요"


    한계에 봉착한 '97년 경제 모델'을 바꾸려면 사회적 합의가 우선인데, 정부와 국회가 양보 없는 싸움을 하다 보니 정책 결정 프로세스 작동이 멈췄다. 전문가들은 "정책 결정권자들이 온통 '힘겨루기'에만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정치권이 이익집단의 논리에 휩쓸려 비판을 두려워하고 보신주의(保身主義)에 빠져 서로 "안 된다"는 얘기만 반복하면서 산업 재편·혁신의 동력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중국까지 도입한 우버가 우리나라에 없는 것만 봐도 사회적 합의 시스템 부재가 혁신을 얼마나 가로막는지 알 수 있다"며 "이 때문에 천문학적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주훈 KDI(한국개발연구원)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정치권이 다투는 가운데 장관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1년이 채 안 되고, 정책 실행력이 1980~90년대보다 떨어졌다"며 "모든 정책에서 찬반이 있기 마련이지만, 반대 의견이 있다고 해서 오랜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대표성'을 제대로 부여해 매끄럽게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도록 새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작년 말 여야 간 입장 차로 경제부총리 한 명 제대로 세우지 못했던 '정치 위주'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정부 부처도 정치 논리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데, 국민의 삶과 직결된 경제 이슈는 정치 논리에 휩쓸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여야가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