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97 경제모델'... 대기업 성장했지만, 혁신은 멈췄다

    입력 : 2017.01.02 09:17

    [한국 경제 새 길을 찾자] [1] 내수·수출 균형경제로 바꿔라


    - 산업화 기득권 잔뜩 낀 '97 모델'
    단기 투자 성과 집착하는 대기업, 수출 낙수효과 줄고 혁신도 꺼려
    삶은 팍팍해지고 미래산업 못 커


    - 내수 살리기, 사회적 합의부터
    누가 정권 잡든 개혁기구 만들고 교육·농업·식품서 가능성 모색
    중국·일본 이미 내수경제 전환


    "한국 경제는 언제까지 '수출 대기업 주도 성장'이란 과거 성공 공식에 머무를 건가? 당장 국민은 '우리의 삶과 상관없는 성장이 왜 필요한가'라고 묻고 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개방화·자유화·유연화'의 깃발을 내걸고 20년을 달려왔다. 그간 변방의 수출 기업이었던 삼성전자·현대차 등이 글로벌 시장을 호령하게 됐다. 1995년 1000억달러를 겨우 넘겼던 무역액은 2011년 세계에서 9번째로 1조달러를 돌파했다.


    하지만 최근 성장은 지체됐고, 양극화는 심해졌다. 경제 성장률은 외환위기 후 1999년 11.3%까지 치솟았지만 2000년대 중반 4~5%대로, 최근엔 2~3%대 저성장의 나락에 떨어졌다.


    경제 전문가 다수는 '수출 대기업 중심 성장 모델'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진단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의 기득권이 잔뜩 끼어 있어 혁신은 없고 성장은 지체된 경제 모델"(박재완 한국선진화재단 이사장), "재벌 대기업 중심의 수출 주도 모델로 단절·양극화된 경제 구조"(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고장 난 자동차처럼 운전사를 교체해도 소용없는 시스템 실패 상황"(이근 경제추격연구소장)…. 이들은 "한국의 성장 모델을 빨리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제로(0) 성장 시대가 멀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수출 대기업 중심 성장 모델 한계에 봉착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지금은 뉴 노멀 시대라고 부르는 세계적인 저성장 시대다. 세계 성장률보다 무역 성장률이 낮아졌는데, 여전히 내수는 생각 안 하고 수출로 견뎌보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전략을 쓰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은 "정부 입김이 강한 제조업·대기업 중심의 수출 위주 모델이라 미래 산업을 선도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대박을 낼 수 있는 역량이 길러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근 경제추격연구소장은 "국내 대기업들은 단기 투자 성과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장기적인 혁신 사업 투자를 꺼리고 있다"며 "대기업 엔지니어가 뛰쳐나가 창업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수출 주도를 소비 주도 엔진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저성장 시대엔 "내수·수출 균형이 새길"


    이미 수출 주도 성장의 한계를 느낀 중국은 2012년 '바오바(保八·8% 성장 고수)'를 포기하고 소비 주도 성장 전략으로 전환했다. 동아시아 수출을 이끌던 일본도 '20년 불황'을 견디다 못해 2013년 '아베노믹스'로 경제 구조를 바꾸고 가계 소득을 늘려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산업화시대 성장 모델 덫에 갇혀 있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소비 비중(2015년 49.5%)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에선 26위에 머무른다. 전문가들은 내수와 수출이 균형 잡힌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앞으로 무역이 어렵다면 내수 비중을 올리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며 "내수는 교육이나 농업, 식품 등에서도 새길을 찾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신규 고용의 80%를 만드는 서비스업에서 좀 더 괜찮고 임금이 높은 일자리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 합심해 새 경제 모델 모색해야"


    하지만 한국 경제의 새길 찾기를 과거 수출 주도 성장을 추진할 때처럼 국가가 앞장서서 강요할 순 없다. 역대 정부가 내수와 서비스업 육성을 외쳤지만 실패에 그친 것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서비스발전기본법은 2011년 12월 발의됐지만 5년째 국회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은 "공동체 사회 작동 원리를 재확립하고 '함께 잘 살자'는 의식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승 전 총재는 "누가 정권을 잡든 여·야·정이 함께 경제개혁추진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장옥 한국경제학회장(서강대 교수)은 "정치인들이 나라의 체질을 가볍고 유연하게 만드는 논의를 해서 혁신, 창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해야 하는데, 각종 논의가 정치권만 가면 막히니 경제의 새길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성장 모델을 평가한 경제 전문가 10명: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서강대 석좌교수),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김인준 서울대 명예교수,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전 기획재정부 장관),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이근 경제추격연구소장(서울대 교수), 장하성 고려대 교수,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국무총리), 조장옥 서강대 교수(한국경제학회장)(가나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