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韓銀 금통위처럼 독립시켜라"

    입력 : 2016.12.14 09:32

    [국민연금 이대론 안된다] [下] 선량한 관리자로 거듭나야


    - 정부 '우산' 아래 놓인 국민연금
    의사결정기구 30%가 정부 인사
    실제로 기금 굴리는 운용본부도 복지부장관이 수장 임명


    - 지배구조부터 뜯어고쳐야
    美 연·기금들은 기업 압박… 주주들이 이사 추천 권리


    미국 애플의 팀 쿡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말 "애플 지분의 3% 이상을 3년 이상 소유한 주주들에게 이사회 이사를 추천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발표했다. 애플뿐만 아니라 코카콜라·마이크로소프트·필립모리스 등 120개 넘는 기업이 비슷한 규정을 도입했다. 이 제도를 도입하도록 기업을 압박한 곳은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캘퍼스·CalPERS), 뉴욕시 공무원연금(NYCERS) 등 미국의 연·기금들이었다. "자본을 댄 주주들이 이사회에 참여해 책임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자본주의"라는 논리였다.


    우리 국민의 노후자금을 책임지는 '큰손' 국민연금은 정반대 행태를 보인다. 사외이사 추천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문다. "정부가 지정한 낙하산 인사를 기업에 꽂으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의식해 잔뜩 몸을 사린다.


    왜 국민연금은 세계 3위 연금으로 성장하고도 해외의 굵직한 연·기금과 달리 자본시장의 감시자 역할을 못 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기업에 투명 경영을 요구하고 장기적인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는 '선량한 관리자' 역할을 하게 만들려면, 국민연금의 지배구조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최고의사결정기구 멤버 30%가 정부 인사


    지난해 11월 서울 한 호텔에서는 국민연금의 전체 투자 방향을 결정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정부 쪽 위원 중 한 명인 기획재정부 정은보 차관보(당시)는 "국민연금이 대체투자(부동산 등 주식·채권 이외의 자산에 대한 투자)의 비중을 더 높여 국내 투자에 대한 기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달 후인 12월 중순, 기재부는 '2016년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며 "국민연금이 국내 대체투자를 늘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정부가 내수 살리기라는 단기 목표를 위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운영해야 할 국민연금을 남용한 사례"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며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찬성한 것이 외부 입김이 작용한 결과 아니냐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투자 배경에 대해 세간의 의구심이 커지는 것은 국민연금의 투자 결정 구조가 정부와 정치권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검찰이 서울 강남구 신사동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를 압수수색 했다. 검찰은 지난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국민연금이 석연치 않은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합병 찬성을 의결, 삼성 측 손을 들어줬다는 혐의에 대해 수사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우선 연금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위원장부터가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전체 20명 위원 중 위원장 포함 6명이 기재부·고용부 등 정부 쪽 사람이다. 자신의 인사권을 쥔 정부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을 지낸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기금운용위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 맞먹는 독립성을 갖출 수 있도록 민간 투자 전문가에 위원장을 맡기고 임기도 보장해야 제대로 된 투자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돈 굴리는 기금운용본부도 정부 영향력 아래


    기금을 실제로 굴리는 기금운용본부도 정부의 '우산' 아래 놓여 있다. 우선 조직 수장인 운용본부장은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의 추천을 받아 복지부 장관이 임명한다. 임명 배경을 두고 계속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강면욱 현재 기금운용본부장이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대구 계성고 1년 후배이고, 직전 홍완선 전 본부장은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의 대구고 동창이었다.


    기금운용본부 자체의 인사·예산에 대한 권한도 연금관리공단 등 외부에서 쥐고 있다. 김상조 교수는 "현재의 국민연금 운용 제도는 과거 연금 규모가 작을 때 사회복지 차원에서 어떻게 연금을 걷고 나눠줄지에 대한 고민만 주로 담고 있어 500조 규모로 연금이 커진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사 결정이 불투명하다는 지적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의 역할이다. 이 전문위는 외부 전문가로 꾸려진 복지부 산하 조직인데,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기업에 의사를 제대로 밝히는지 견제·감시하는 역할을 하라고 만들었다. 문제는 이 위원회가 '기금운용본부가 판단하기 어려운 사안 등'에 대해서만 검토하도록 해 놓고 '판단하기 어려운' 기준이 무엇인지는 기금운용본부가 '셀프 판단'하게 돼 있다는 점이다. 판단의 기준이 뭔지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고려대 경영학과 김우찬 교수는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가 검토할 사안을 전문위원회가 직접 고를 수 있는 권한만 부여해도 기금 운영이 더 투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 결정, 임원 선임 회의록 남겨라"


    2012년 하나금융 김승유 회장은 국민연금에 사외이사 추천을 요청했다. 당시 국민연금은 주주권 행사 차원에서 사외이사를 선임하기 위한 절차에 돌입했으나 막바지에 결국 포기했다. 하나금융에 투자하는 국민연금이 이사회 내부 정보를 활용해 투자 결정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내부 정보를 빼내 투자한다는 의혹까지 받는 것은, 투자 결정이나 임원 선임 등에 대한 절차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전직 경제 관료는 "국민연금은 기금운용본부장 선임 등 중요한 사안에 대해 껍데기만 '공모'라고 해놓고 실제 평가 기준 등은 제대로 공개하지 않아 의혹을 키우곤 한다"라며 "모든 투자 결정과 임원 선임 절차를 상세한 회의록으로 남겨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국민연금 이미지가 크게 훼손된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요즘 기금운용본부는 인력 이탈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내년 초 전북 전주 이전을 앞두고 올해 들어 30명 가까이 회사를 떠났다. 이직자가 작년의 3배다. 추가 이탈 조짐도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증권업계로 높은 연봉을 받고 간다는데 붙잡기 어렵다"며 "전주 이전을 철회했다간 지역 정치인들이 난리를 칠 게 뻔해 정치인 눈치까지 봐야 하는 것이 국민연금의 현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