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 주도한 해운업 구조조정 '예고된 실패'

    입력 : 2016.12.13 09:56

    [한진해운 청산 결정… 현대상선은 해운동맹 정식회원 가입 못해]


    "유동성 문제는 자체 해결하라" 일반 제조업처럼 접근… 禍 키워
    현대상선, 2M이 동의 안하면 선박 규모 확대할 수 없어
    "현대상선 키워 한진해운 대체" 정부 구상은 완전히 어긋나
    "선박 확대 위한 로드맵 시급"


    국내 1위, 세계 7위의 한진해운마저 청산 결정이 났다. 전날 한진해운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던 현대상선마저 글로벌 해운동맹에서 사실상 탈락한 데 이은 비보(悲報)에 국내 해운업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한진해운 실사 작업을 진행해 온 삼일회계법인은 13일 '한진해운을 유지하는 것보다 청산하는 게 더 낫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법원에 제출한다. 삼일회계법인은 한진해운을 회생시킬지 아니면 청산시킬지 판단하기 위해, 법원의 의뢰로 실사 작업을 해왔다. 법원 관계자는 "한진해운의 남은 자산을 모두 매각하는 시점에서 최종 파산선고를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한때 세계 6위였던 한국 해운업은 붕괴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올해 상반기까지 약 160척에 달하던 국내 컨테이너선은 정부의 잇따른 구조조정 실책 속에 현재 70척 수준까지 추락했다. 하지만 정부와 채권단은 12일에도 "현재 세계 13위인 현대상선을 5년 후 세계 7~8위권으로 육성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해운업계에선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않는 한 한국은 해운업 없는 국가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세계 6위였던 한국 해운업 붕괴


    현대상선 유창근 사장은 12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앞으로 3년간은 내실 다지기에 집중하고, 이후 외형 확장에 나서 2021년에는 세계 7~8위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대상선은 2M과 '전략적 협력 관계'를 맺는 2020년 3월까지는 2M 회원사인 머스크와 MSC의 동의를 받아야만 선박 규모를 확대할 수 있다. 현대상선이 자의적으로 선박 규모를 늘려, 글로벌 선박 공급 과잉을 심화시킬 것을 우려해 2M이 일종의 족쇄를 채운 것이다.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현대상선 본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유창근(앞줄 왼쪽) 현대상선 대표가 "앞으로 2~3년은 사업 확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이런 제약 때문에 한진해운을 법정관리로 보내면서 "현대상선을 키워 한진해운을 대체하겠다"는 정부의 구상은 완전히 어긋나게 됐다. 지난 6월 정부가 발표한 '해운 경쟁력 강화 방안'의 핵심은 "선사들이 부채비율 400% 이하 기준을 충족시킬 경우, 신규 선박 발주를 지원하기 위해 '선박 신조(신규 건조) 지원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진해운은 파산 상태이고, 현대상선은 선박 규모를 늘릴 수 없어, '선박 신조 지원 프로그램'은 무용지물이 된 셈이다.


    ◇금융이 구조조정 주도한 게 패착


    정부가 이처럼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은 해운업 구조조정을 금융 관료들이 주도하면서 해운업의 특성을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글로벌 해운시장에선 생존을 위해 '치킨 게임(마주 보고 달리는 자동차처럼 죽기 살기식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글로벌 해운사들은 인수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우고 있다. 올 3월엔 중국 1·2위 선사인 중국원양운수(COSCO)와 차이나시핑(CSCL)이 합쳤고, 머스크도 최근 독일 해운사인 '함부르크 쉬드'를 인수했다. 또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형 선박을 발주해 선박 규모도 키웠다.



    하지만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정부가 요구한 '부채비율 400%'를 맞추기 위해 벌크선 사업부 등 알짜 자산과 선박을 매각했다. 더구나 정부는 지난해 12월 "유동성 문제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구조조정의 원칙을 밝히면서, 정부가 해운사를 지원할 수 있는 명분을 스스로 없애 버렸다.


    지난 5월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모두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에 들어간 이후에는 두 회사를 합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해운업계에서 나왔다. 정부나 채권단 지원으로 부실을 떨어낸 후, 두 회사를 합병해 규모를 키우면, 글로벌 해운사에 맞설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정부는 "부실한 두 회사를 합치면 부실만 커지고, 민간 기업을 무조건 지원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박명섭 성균관대 교수는 "금융 관료들은 금융 논리만 따져 법정관리를 결정했고, 국가 기간산업인 해운업이 무너지는데 이를 수습할 컨트롤 타워마저 없었다"고 말했다.


    ◇"장기 로드맵 시급"


    한국 해운업을 벼랑 끝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정부 차원의 획기적인 지원책이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해운업계에선 현대상선을 중심으로 선박 규모를 확대하는 국가 차원의 장기적인 해운업 육성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양창호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원장은 "장기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선박 규모를 키우지 않고서는 개별 해운사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며 "단기 처방이 아닌 장기적 로드맵(실행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종길 성결대 교수는 "규모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국내 해운사 간 합병을 고려해야 한다"며 "그것이 힘들면 국내 해운사 간에 해운동맹을 먼저 맺고, 하나의 해운사처럼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