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감시엔 손 놓은 '큰손' 국민연금

    입력 : 2016.12.13 09:35

    [국민연금 이대론 안된다] [上] 무기력한 감시자


    - 국민연금, 주주로서의 직무 유기
    부패기업서 투자금 회수하거나 재발방지 요청한 적도 없어
    한국 기업 지배구조, 아시아 꼴찌


    - 해외 연금은 "부패기업 투자 없다"
    의결권 행사와 적극 주주 제안
    日 국민연금, 기업 체질개선 주도


    '최순실 게이트'로 정경 유착의 폐해가 또다시 드러났다. 시장 전문가들은 정치권력과 기업 간 검은 거래를 끊어낼 감시자로 자본시장의 큰손, 국민연금의 역할을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국민연금은 기업에 대한 견제자 역할을 방기한 채 각종 외풍에 시달리고 있다. 왜 국민연금은 시장에서 감시자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걸까. 그 실상과 문제 해법을 2회에 걸쳐 살펴본다.


    네덜란드 연기금 운용사인 PGB는 2012년 4분기부터 지금까지 한국전력을 '투자 부적격 기업'에 올려두고 있다. 사유는 '부정부패와 뇌물'이다. PGB는 2012년 한전과 한국수력원자력이 연루된 광범위한 원전 납품 비리가 드러난 이후 마땅한 재발 방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이들 기업을 '투자 부적격'으로 분류했다. 독일·노르웨이의 연금 운용사 델타로이드와 스토어브란트도 같은 이유로 한전을 투자 부적격 대상에 올렸다. PGB 안스 바우만스 커뮤니케이션팀장은 "부정부패 방지를 명시한 유엔 책임 경영·투자 규약인 '글로벌 콤팩트'에 어긋나는 기업은 (투자 부적격으로)골라내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정반대다. 유엔 '글로벌 콤팩트' 준수 의무를 담은 유엔 책임투자원칙(PRI)에 2009년 서명했지만 '행동'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한전을 '책임투자를 고려하는 자산군'으로 지정해두고, 2년 전 6.2%였던 지분을 7.1%(3분기 기준)로 늘렸다. 한전에 비리나 부정부패 근절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외국계 연기금의 외면을 받는 한전 주가는 지난 2년 동안 0.2% 하락해 코스피 상승률(0.6%)도 못 따라가고 있다.


    대기업이 광범위하게 연루된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한국 자본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이 정경유착, 비리, 뇌물 제공 같은 한국 기업의 '고질병'을 끊어낼 감시자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비리 기업 '경고' 한 번 안 한 국민연금


    국민연금은 '부패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유엔 PRI에 2009년 가입하고도,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 적이 한 번도 없다. 2009년 이후 횡령 등의 혐의로 총수가 유죄 판결을 받은 SK·현대·롯데·삼성 등에 대해 투자금 회수는커녕 재발 방지책 마련을 요청한 적도 없었다. 고려대 경영학과 김우찬 교수(경제개혁연구소장)는 "대기업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과 '힘'을 고려하면 한국에서 이들 기업을 견제하고 잘못된 관행에 대응할 수 있는 기관은 국민연금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은 시장 감시자로서의 역할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연금인 국민연금이 굴리는 돈은 545조원,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290개에 달한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분석 결과 국민연금은 최순실 주도로 만들어진 미르 재단에 돈을 낸 25개 상장사 모두의 주식을 보유 중이고 이 중 18개 회사엔 5%가 넘는 지분이 있었다. 국민연금이 사전에 투자회사들의 투명 경영을 요구하며 감시견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이토록 광범위한 정경유착을 막을 수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한국 기업 지배구조 순위, 아시아 꼴찌


    국민연금이 손 놓은 사이 해외 연·기금들이 한국 기업에 대한 감시자 역할을 하고 있다. 네덜란드 연금 운용사 APG는 삼성전자의 감사 보고서가 불투명하다고 2013년에 지적해 삼성전자로부터 '주총 시점 이전에 투명한 감사 보고서를 제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국민연금의 이런 무력한 행태는 일본 국민연금 운용법인(GPIF)이 아베 신조 총리의 지원 아래 일본 자본시장의 '책임 투자 전도사'로 변신한 것과 대조된다. 아베는 2014년 6월 파이낸셜타임스에 '일본 기업 지배구조 변화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과정에 GPIF가 성장을 이끌어내는 투자를 하도록 독려할 것'이라며 일본 국민연금의 역할 강화를 예고했다. 이후 GPIF가 주도해 일본 연·기금과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을 명시한 '스튜어드십 코드'를 이끌어내고, 미즈노 히로미치 GPIF 최고투자책임자(CIO)가 적극적인 선거 운동 끝에 유엔 PRI 이사에 당선되는 등 나라 안팎으로 '일본 국민연금이 일본 기업의 체질 개선을 이끈다'는 메시지를 설파하는 모습이다.


    한국 기업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막지 못하는 국민연금의 직무 유기는 불투명한 경영, 주주에게 불리한 기업 지배구조를 방기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고착화시킨다. ACGA와 글로벌 금융회사 CLSA가 아시아 기업 1200개를 기업 지배구조의 건전성을 가늠하는 약 50개 기준(이사회 독립성, 투명한 공시 등)으로 분석해 발표한 '2016년 지배구조 순위'에서 일본은 12개 나라 중 2위, 한국은 꼴찌를 기록했다. 4년 전(10위)보다 2단계 떨어졌고, 중국·필리핀·인도네시아보다도 낮은 순위다. 연세대 경영학과 신진영 교수는 "국민연금이 정부 입김에 휘둘린다는 의혹에서 벗어나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와 관련한 지침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