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國調·특검... 일손 놓고 불려다니는 총수들

    입력 : 2016.11.29 09:56

    [내달 6일 청문회 증인 출석]


    - 인사·투자계획 전면 중단
    전략·기획·법무조직 총동원… 예상 질의·답변 자료 준비
    - 특검 앞두고 구체적 답변 힘들수도
    망신주기식 돌발 질문 우려… 국감 때도 훈계성 질의 많아
    "고령에 버틸까" 건강 걱정도


    28일 SK그룹 서울 서린동 본사. 법무·대관(對官) 관련 임원들이 모여 비상회의를 열었다. 내달 6일 최태원 회장의 국회 국정조사 증인 출석을 앞두고, '면세점 추가 허용 로비' 등 지금까지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한 대응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SK뿐 아니다. 총수들이 국정조사에 증인으로 채택된 9개 그룹엔 초비상이 걸렸다. 전략·기획을 담당하는 핵심 조직들이 총동원돼 온종일 예상 질의·답변 자료를 준비했다. 5대 그룹 관계자는 "국민적 의혹을 풀겠다는 데는 우리도 동의한다"면서 "하지만 구체적인 혐의도 나오지 않은 회장까지 포함해 9명을 동시에 생중계 자리에 불러내는 것은 글로벌 기업 이미지에도 상당한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재계 총수, 국정조사 준비에 '업무 올스톱'


    이재용 부회장이 출석하는 삼성그룹은 지난 21일 총수들의 국정조사 증인 채택이 확정된 후 미래전략실 소속 법무·대관 임원들이 수시로 모여 대책 회의를 열고 있다. 삼성은 최순실 딸 정유라에 총 78억원을 지원했고, 최씨를 통해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삼성은 정유라 지원은 합병이 결정된 이후 이루어진 것으로, 두 사안 간에는 연관성이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국정조사에서 최씨 측의 강압에 의해 지원한 부분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합병 등과 관련한 의혹에는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해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와 LG그룹, 롯데그룹, 한화그룹 등도 총수를 대상으로 리허설을 준비하거나 예상 답변을 만들고 있다.


    고령에다 건강이 좋지 않은 총수들이 국정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도 기업들엔 부담이다. 1938년 생(生)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우리 나이로 79세로 역대 청문회 증인으로는 최고령이다. 손경식(77) CJ 회장은 지난 7월 폐암 수술을 받고, 현재 치료 중이다. 재계 관계자는 "여든에 가까운 총수들은 하루 종일 증인석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건강에 무리가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호통치기''망신주기' 국조로 전락 우려


    "한국인이며 한국 기업을 운영한다고 했는데, 한국과 일본이 축구 시합을 하면 한국을 응원하느냐."


    지난해 9월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에서 한 의원이 신동빈 롯데 회장에게 물었다. 롯데의 지배구조와 경영권 분쟁에 대해 묻겠다며 신 회장을 불렀으나, 엉뚱하게 '한일 축구 시합'을 꺼낸 것이다. 또 다른 의원은 "지역구에 추진 중인 롯데의 골프장 건설이 등산객을 불편하게 한다"며 공사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재계에선 이번 국정조사도 '최순실 사태'의 진상 규명 대신 총수에 대한 '망신주기' '호통치기'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 때는 '한진해운 사태'와 관련해 조양호 회장에게 '오너의 책임'을 강조하며 답변은 듣지 않고 장시간 질책성 주장만 펴는 '강의성 질의'가 많았다.


    국회에서 기업 총수에 대한 이런 면박주기식 질문은 미국 등 선진국의 사례와는 비교된다. 2008년 11월 미국 의회에서 GM 등 '빅3' 자동차 회사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청문회가 열렸다. 당시 의원들은 부실 경영에 책임이 있는 CEO들이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온 것에 대해 질타하면서도, 기업 회생에 대한 구체적 방안들이 논의됐다.


    당시 의원들은 '구제금융 자금 7000억달러 중 250억달러를 자동차 산업에 투입' '미국 자동차 경쟁력 향상을 위해 연비 개선 사업에 250억달러를 지원' 등 구체적 회생 방안에 대해 질의하고 논의했다. 미국 정부는 당시 청문회 결과를 바탕으로 '빅3' 회생 방안을 결정했고, 결국 3사는 회생에 성공했다.


    면박주기식 질문 공세를 피하기 위해 국정조사를 비공개로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국정조사가 생중계되면, 의원들이 인기영합주의에 빠져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질문을 할 가능성이 크다"며 "오히려 내실 있는 질의응답을 위해서는 비공개로 진행하고 내용은 추후에 공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특검·국조 동시 추진으로 혼란


    재계는 검찰 특별수사본부의 조사에 이어 국정조사와 특검이 동시 다발적으로 열리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다. 9명의 총수 가운데 허창수 GS그룹 회장(전경련 회장)을 제외한 8명은 이미 한 차례 검찰 조사를 받았다. 국정조사에 이어 특검이 실시되면, 또다시 특검에도 나갈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특검 조사를 앞두고 총수들이 국정조사에서 구체적 진술을 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정조사 증언 내용과 특검 진술이 다를 경우, 불리하기 때문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재벌 총수들 입장에선 자기 진술이 외부로 공개됐을 때 불리해질 수 있는 만큼, 방어권 차원에서 대부분의 질문에 답변하기 힘들 것"이라며 "이 때문에 국정조사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