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조 나라살림 졸속 심사... 고용예산 뭉텅 삭감, 쪽지민원 폭주

    입력 : 2016.11.28 10:09

    [국정농단 & 탄핵정국]
    탄핵정국에 묻혀 버린 내년 예산안… 법정시한 나흘 앞으로


    - 질질 끌다 '벼락 심의'
    '최순실 사태' 후 심사 속도 못 내… 이달 7일에야 예산案 소위 가동


    - 고용 예산 6400억 잘려 나가
    野, 구직·産災 관련 4500억 삭감… 청년취업·장애인 예산도 '싹둑'


    - 선심성 사업엔 뭉칫돈 투입 우려
    의원들 지역구 민원 요청 4000건… 예결위, 증액사업 내용 공개 안해


    "예산안에 담긴 사업 숫자가 7500개에 달하는데 한 달 남짓한 시간에 꼼꼼히 보는 건 물리적으로 어렵죠. 게다가 올해는 국회가 탄핵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예산안을 붙잡고 있을 여유가 있겠습니까?"(기획재정부 예산실 관계자)


    액수로 400조원에 달하는 내년 정부 예산안을 처리해야 하는 법정 시한(12월 2일)이 나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국회의 예산 심사가 졸속으로 진행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국회가 12월 초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통과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어 비슷한 시기에 처리해야 하는 예산안에 대한 관심은 뒤로 밀리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국회는 선심성 지역구 사업에 뭉칫돈을 투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지부진한 예산 심의


    정부는 지난 9월 2일 국무회의를 거쳐 400조7000억원으로 짠 내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10월 말 '최순실 사태'가 정국의 태풍으로 떠오른 이후부터는 예산 심사가 거의 속도를 내지 못했다. 국회는 이달 7일에야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예산안 조정소위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법정 처리 시한까지 한 달도 남지 않은 기간에 예산안을 본격 심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논의의 시작점도 늦었는데 야당이 탄핵안과 예산안을 비슷한 시기에 함께 처리하자며 속도를 내다보니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단적으로 예년에 비해 적은 예산 감액(減額) 규모가 성실한 심사가 이뤄지지 않는 증거라는 지적이 나온다. 27일까지 감액 규모는 2조5000억원가량으로 전체 예산안의 0.6% 정도다. 향후 논의 과정에서 늘어날 가능성은 있지만, 매년 1% 정도(3조~4조원)씩 감액했던 것에 비하면 국회가 정부 예산을 꼼꼼히 들여다보던 범위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평가다.


    ◇고용 예산 6400억원 깎였지만 여당·정부 대응 못 해


    현재 정국 주도권을 야당이 쥐고 있는 데다, 예산결산특별위원장(더불어민주당 김현미 의원)도 야당이 맡고 있다. 내홍을 겪고 있는 여당은 예산 심사 과정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야당이 '최순실 예산'이라 불린 문화 예산을 2800여억원 삭감한 것은 예상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민생 예산이 상당수 포함된 고용 예산이 6400여억원이나 잘려나갔는데도 여당과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정부는 고용을 다소 유연하게 하는 방향으로 근로기준법 등을 개정하는 대신, 구직급여를 늘리는 등 재정을 투입해 충격을 흡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야당은 노동 관련 법률안 통과를 일절 막고, 법률 통과를 전제로 짜놓은 예산을 모조리 삭감했다. 이로 인해 구직급여 예산을 3262억원 깎았고, 산재보험에 투입할 돈도 1281억원 삭감했다.


    민생용 예산도 대폭 깎였다. 장애인·기초생활수급자 등의 취업을 돕는 예산이 98억원 삭감됐고, 청년취업진로 사업은 104억원 깎였다.


    ◇증액 심사 비공개로 돌려… 올해도 '나눠 먹기'


    앞으로가 더 큰 문제이다. 감액 논의가 마무리 국면으로 가면서 국회는 지방의 도로·철도 등 SOC사업 예산을 중심으로 증액(增額) 논의를 시작했는데, 현재 국회의원들이 증액을 요청한 사업은 4000건이 넘고, 액수로는 40조원에 달한다. 거의 대부분 지역 민원(民願) 사업들이다.


    이런 '희망사항'을 모두 수용할 수 없다보니 국회 예결위는 지난주부터 예산안조정소위안에 여야 3당 간사로 구성된 증액소소(小小)위원회를 만들어 증액할 사업을 비공개로 고르고 있다.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 시행을 계기로 '쪽지 예산을 없앤다'면서 국회는 예산안조정소위를 올해 처음 공개했는데, 증액 논의는 소위 안에 다시 작은 모임을 만들어 밀실에서 진행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처럼 '예산 나눠 먹기'가 진행되어도 알 길이 없다. 이에 대해 국회 예결위 관계자는 "4000개가 넘는 요청 사업 중에 일부만 골라내야 하니까 공개된 장소에서 하면 논란이 더 커질 수밖에 없어 증액소소위원회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증액소소위에 자기네 지역구 사업을 챙겨달라는 의원들의 요청이 폭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7일까지 증액된 예산은 서해안복선전철 건설비 2800여억원을 늘리는 등 모두 2조3000억원에 달한다.


    최병호 한국재정학회 회장(부산대 교수)은 "국민들이 예산 심사 과정을 알 권리가 있다"며 "감액과 증액 과정을 널리 공개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