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 벤처도 돈줄 말랐다

    입력 : 2016.11.23 10:13

    [상승세 꺾인 신규 투자액, 올해 4.9% 줄어… 내년 더 어렵다]


    反실리콘밸리 정서 강한 트럼프 당선으로 열기 더 급랭
    투자 못구해 전환사채 발행도
    "스타트업 2~4년차가 고비… 이러다 창업 불씨 꺼질라"


    2년 전 창업한 U사(社)는 3차원(3D·입체) 건축설계 분야에서 최고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작년에 미국과 국내 벤처투자사 등 4군데서 10억원을 투자받았고, 4개월 전 시제품을 내놓자 30여 기업이 제휴하겠다고 달려들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기술 벤처 성공 스토리였다. 하지만 최근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투자시장이 얼어붙으며 추가 투자 유치가 어려워진 것이다. U사 대표는 "내년 봄까지 추가 투자를 못 받으면 자금이 다 떨어진다"고 말했다.


    국내 벤처 업계에 경고등이 켜졌다. 벤처로 흘러오는 돈줄이 마르면서 유망 벤처들이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집계에 따르면 올 1~9월 벤처기업 신규 투자액은 1조4815억원에 그쳐, 작년 같은 기간보다 4.9%가 줄었다. 2012년 이후 투자 규모가 매년 10% 이상 급증했지만 상승세가 한풀 꺾인 것이다. 더 문제는 내년이다. 세계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가운데 반(反)실리콘밸리 정서가 강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과 최순실 사태까지 겹쳐 벤처 투자 열기가 급랭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의 김광현 센터장은 "내년에는 벤처 투자 생태계가 올해보다 훨씬 열악할 것"이라며 "창업 불씨가 완전히 꺼져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분야별 대표 스타트업들도 투자 못 받아


    작년 창업한 맞춤 패션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H사는 지난 6개월 동안 벤처투자사 3곳과 투자 협상을 진행해왔지만 진척이 없다. 이 회사는 창업 이후 꾸준히 가입자를 늘리며 현재 주요 백화점과 공동 사업을 펼칠 정도로 궤도에 올랐으나 추가 투자 자금 확보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H사 대표는 "공격적으로 가입자를 확장해야 할 시점인데, 투자금이 없어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벤처기업협회 김영수 전무는 "창업 1~3년 차 업체 중 사업성과 기술력이 있어도 운영 자금 수천만원이 없어 도산하는 경우가 숱하게 많다"며 "투자 감소가 벤처 업계에 미치는 연쇄적인 악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말했다.


    22일 서울 송파구 가든파이브 건물 5층에 있는 '강남청년창업센터' 출입문 앞에 "모든 시설의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서울산업진흥원은 이달 말 임대 계약이 끝나는 가든파이브 내 창업센터를 폐쇄하고 내년에 다른 공간에 재설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진한 기자


    우리나라 대표 벤처기업도 투자 유치를 못 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 벤처기업 80여개가 모인 '벤처 연합'인 옐로모바일은 이달 해외에서 '전환사채(CB)'로 1000만달러(약 115억원)를 유치했다. 전환사채는 원금과 이자를 상환해야 하는 빚이다. 투자 유치가 힘들자 어쩔 수 없이 전환사채를 발행한 것이다. 옐로모바일은 2014년 말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에서 1조원 기업 가치를 인정받아 1억500만달러(당시 환율로 1140억원)를 투자받았다. 하지만 주력 사업의 수익성 확보가 늦어진 데다 추가 투자까지 힘들어지면서 핵심 계열사인 피키캐스트는 올해 직원 30%를 감축하기도 했다. 피키캐스트는 사진과 동영상으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업체로 월 이용자가 600만명이 넘는다.


    ◇내년 투자 급랭 우려… 정부 정책 자금도 급감


    정부도 벤처 투자 열기가 급격히 식어버리는 상황을 막기 위해 벤처 투자 업체에 투자금 조기 집행을 독려하며 안간힘을 쏟고 있다. 미래부 등 정부 벤처 투자 자금을 관리하는 한국벤처투자는 최근 정부 자금을 투자받은 100여개 펀드 운용사에 "연내 벤처에 투자하면 수수료(관리 보수)를 20~30% 더 주겠다"는 당근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벤처캐피털 한 관계자는 "요즘 같은 경색 국면에서 정부가 조기 집행하란다고 선뜻 투자에 나서는 곳이 있겠냐"고 말했다.


    내년에는 이런 정책 수단을 쓰기도 쉽지 않다. 정부는 올해(2130억원)보다 23% 줄어든 1630억원의 벤처투자 정책자금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은 상태이지만 야당이 다수인 국회에서 삭감될 가능성이 크다. 엔젤투자협회 고영하 회장은 "스타트업은 창업 2~4년 차에 추가 투자를 받아야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건넌다"며 "미래의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을 키우는 창업 지원 정책은 여야가 따로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