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공헌 하라며... 정권마다 기업에 수십~수백억 '收金 통치'

    입력 : 2016.11.18 09:44

    [정부 예산 쓸 사업에 기업 동원… 朴정부서도 2164억 걷어]


    - '성의 표시' 안 할 수 없는 기업
    창조센터도 대기업이 떠맡아 "돈 내라는데 버틸 재간 없어"


    - 미르·K스포츠에 국민세금 187억
    기업이 낸 774억에 공제 혜택, 국민들에게 부담 전가되는 구조


    - 기업, 반대급부 노리진 않았나
    정부와 흥정했다면 공범인 셈… 비용 지출땐 이사회 거치게 해야


    "정부 쪽에서 '동참해주면 고맙겠다'는 전화를 받고 모른 체하기는 어렵죠. 찍히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성의'를 표시할 수밖에요."(대기업 대외협력 담당 임원)


    "내라는 돈 안 내면 세무조사 당하는 그림이 눈앞에 그려지니 안 내고 버틸 재간이 없는 거죠."(경제단체 고위 관계자)


    미르·K스포츠재단에 기업들이 774억원을 반강제적으로 출연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권마다 기업들을 상대로 기부나 출연의 방식으로 돈을 내도록 하는 악습을 끊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수금(收金) 통치'의 성격이라 민간의 자율성을 해치는 데다, 결국 국민 전체의 부담으로 전가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회 공헌 명분으로 기업들 거액 출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모금이 1990년대에 사법적인 단죄를 받고, 2004년 정치자금법이 개정된 이후 노골적인 정치 자금 요구는 거의 사라졌다. 이후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에 출연하거나 기업 스스로 사회 공헌 사업을 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사회 공헌이라는 외피(外皮)를 두른 '강제 모금'이라는 비판이 그치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으로 774억원을 낼 것을 요구한 것을 비롯해 청년희망펀드에 800억원, 지능정보기술연구원에 210억원 등 총 2164억원을 기업들이 내도록 유도했다. 정부는 또 창조경제혁신센터 17곳 중 15곳을 대기업이 떠맡도록 하고 지역까지 할당했다. 대외협력 담당 대기업 임원 A씨는 "(정부가) 각종 인허가권을 갖고 있는 데다 공정거래위원회 등 규제 기관이 목을 조를 수 있으니 정부 쪽에서 좋은 취지라고 설명해도 일단 돈을 내라면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긴장된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도 기업 자금을 활용한 관제 사업을 벌였다. 미소금융(저소득층 금융 지원) 사업에 기업들의 참여를 독려해 5000억원 이상을 내도록 했다. 따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균형 발전을 기치로 내건 동반성장기금에는 기업이 7000여억원을 출연했다.


    정부가 기업 자금을 모집하는 '출연형 모금'의 시초는 1980년대 일해재단이다. 전두환 정부는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의 희생자 지원을 명목으로 이듬해 일해재단을 만들어 기업들로부터 598억원을 받아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북한에 비료 보내기 사업을 하면서 재계에 100억원을 할당해 논란을 빚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글로비스 비자금 사건 직후 1조원의 사재를 내놓고, 이건희 삼성 회장 일가가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을 계기로 8000억원을 내놓는 등 비리 혐의나 탈법적인 행위가 드러난 대기업 오너들이 사재 환원을 발표하는 사례가 나타났는데, 정부가 유도한 결과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외에도 홍수·가뭄 때 기업 성금이나 평창 동계올림픽 등 스포츠 행사 협찬금도 반강제적인 성격이라는 시각이 많다. 재계에선 이처럼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을 독려해 자금을 모집한 돈이 적어도 수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미르·K재단 187억원은 국민이 낸 셈


    정부가 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을 특정 분야에 집중하도록 강제적으로 몰아가면 갖가지 폐해가 양산된다. 아무래도 기업이 투자·고용에 쓸 돈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경제단체의 한 간부는 "정부가 하는 사업에 출연하는 건 일종의 '보험료' 성격이 강해 경영상 비용이 증가하는 셈"이라고 했다. 국민에게도 부담이 전가된다. 세무 전문가들에 따르면, 미르·K스포츠재단의 경우 기업들은 774억원을 냈지만, 공제 혜택으로 그중 최대 187억원을 돌려받게 된다. 결국 미르·K스포츠재단에 국민 세금이 187억원이 투입되고, 기업들이 실질적으로 낸 돈은 587억원에 그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정치권력의 기업 옥죄기를 막아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경제개혁연대에 따르면, 미르·K스포츠재단에 10억원 이상을 내놓은 23개 기업 중 이사회 의결을 거친 곳은 단 두 곳에 그쳤다. 나머지는 죄다 이사회를 거치지 않고 쌈짓돈을 슬쩍 내놓았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불법적이거나 강제적인 비용을 지출할 때는 반드시 이사회에 보고하고 의결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팔 비틀기와 관련해서 기업을 마냥 피해자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강병구 인하대 교수는 "미르·K스포츠에 돈을 내면서 기업들이 반대급부를 노리고 정부와 흥정을 했다면 공범(共犯)이라고 봐야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