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시장 '트럼프 발작'... 1조5000억달러 날렸다

    입력 : 2016.11.16 09:49

    [트럼프發 인플레이션 우려에 전 세계 채권 가치 폭락]


    - 트럼플레이션 공포
    재정 확대로 경기 부양 공약, 물가 오르면 채권 투자는 손해


    - 잠 못 이루는 여의도 증권가
    "어떤 증권사는 손절매 하느라 채권 수천억 던졌다더라" 소문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예상을 깨고 9일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여의도 증권가 풍경은 둘로 갈렸다. 뜻밖에 큰 타격이 없는 주식시장에선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는 반면, 채권 금리 급등(채권 가격 급락)이라는 충격에 빠진 채권 트레이더들은 피 말리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한 채권 트레이더는 "요즘 채권시장에선 '어떤 증권사가 손절매(더 큰 손해를 막기 위해 투자했던 상품을 파는 것)를 하느라 채권 수십 개(1개=100억원어치)를 던졌다더라'는 얘기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며 "미국 채권시장 동향이 불안해 밤잠을 설칠 지경"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채권 금리가 폭등하는 이른바 '트럼프 탠트럼(tantrum·발작)'이 발생해 전 세계 채권 투자자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미 대선 전까지만 해도 트럼프 당선 시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 탓에 안전자산인 채권으로 돈이 몰려 금리가 낮아지리라고 전망하는 전문가가 많았다. 그러나 실제 트럼프가 당선되자 재정 확대 정책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유발하리라는 전망이 커지면서 채권 금리가 무섭게 치솟는 모습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5일 "채권 금리 상승으로 채권 가치가 폭락하면서 글로벌 채권 투자자들의 손해가 불어나고 있다. 트럼프 당선 이후 전 세계 채권 투자자들이 입은 손실은 1조5000억달러(1752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분석된다"라고 전했다. '채권왕'이라 불리는 제프 군드라흐 더블라인캐피탈 CEO(최고지도자)는 지난 13일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재정 확대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앞으로 4~5년 동안 만기 10년 국채 금리가 6%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의 기준금리 인상이 계속 미뤄지며 올해 내내 하락했던 미국 채권 금리는 트럼프 당선 이후 4거래일 만에 가파르게 치솟아 연초 수준을 회복했다. 선거일인 11월 8일 1.85%였던 3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14일 2.24%까지 올라갔고, 2.62%였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3.00%로 상승해 거래됐다. 10년 만기 미 국채 금리가 3% 위로 올라간 것은 지난 1월 초 이후 처음이다. 미 대선 전에 0.19%였던 10년 만기 분트(독일 국채) 금리는 14일 0.32%로 올랐고, 30년 만기 분트 금리는 5월 이후 처음으로 1% 위로 상승했다. 일본 국채 금리는 -0.07%에서 0.00%로 올라 9개월 만에 마이너스에서 벗어났다.


    한국 국채도 연일 상승세다. 투자자들이 채권을 팔아치우면서 3년 만기 한국 국채 금리는 트럼프 당선 후 4거래일 동안 0.23%포인트(9일 1.40%→15일 1.63%) 올랐고,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0.37%포인트(1.67→2.04%) 상승했다. A증권사 채권 트레이더는 "트럼프 당선 다음 날인 10일 아침 시장이 열리자마자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0.2%포인트나 상승하며 거래를 시작해 눈을 의심했을 정도"라며 "하루 이틀 그러다가 금리가 진정되리라고 희망했던 투자자들이 이번 주 초부터는 포기하고 채권을 내다 팔고 있다"고 말했다.


    채권 금리 상승의 배경엔 이른바 '트럼플레이션(트럼프가 유발할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트럼프는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미국 경기를 되살리겠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재정 확대를 통한 경기 부양이 현실화할 경우 물가 상승이 불가피하리라는 전망이 많다. 채권은 미리 정해진 금리가 수익을 결정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으로 통화 가치가 내려가면 투자자는 손해를 본다.


    정부가 재정을 확대하기 위해 국채 발행 물량을 늘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전망도 국채 금리를 끌어올리는 요인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채권이 늘어나면 가격은 내려갈 수밖에 없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제 채권 금리 상승이 고착화해 초저금리가 유발한 ‘채권의 시대’가 종말을 맞을 것인지 분석하느라 다급한 모습이다. 웰스파고자산운용 마지 파텔 매니저는 FT에 “트럼프 당선으로 투자에 급박한 변화가 발생했다. 새 투자 패러다임의 시대가 닥쳐 장기간 지속된 금리 하강기가 끝나갈 가능성도 제기되는 중”이라고 말했다. 유가·곡물 등 상품 가격이 오르고 있고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임금이 상승한다는 점도 인플레이션 발생에 이은 채권 금리 상승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반면 채권 금리 상승이 예기치 못한 선거 결과가 유발한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SK증권 김동원 연구원은 “유럽·일본 등 미국이 아닌 주요 선진국에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려면 긴 시간이 소요될 가능성이 크고, 트럼프가 막대한 국가 부채를 유발하면서 실제로 재정 확대를 할지도 아직 미지수”라며 “채권 금리 상승이 계속 이어질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채권과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의 관계


    채권은 만기 때 받을 원금과 이자액이 사전에 정해져 있는데 물가가 올라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원금과 이자의 가치가 하락해 투자자가 손해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