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미디어 빅뱅

    입력 : 2016.10.28 09:38

    AT&T, 타임워너 인수하며 97조짜리 빅뱅, 최대 사업자로 급부상…
    세계 최대 온라인 동영상 넷플릭스 긴장


    미국 2위 통신 업체 AT&T가 지난 22일(현지 시각) 미국 3위 미디어 기업 타임워너를 854억달러(약 97조원)에 인수하면서 전 세계 미디어 시장의 판을 흔들고 있다. '거대 통신 자본의 미디어 진출'은 전통적인 미디어 산업 생태계를 바꿀 정도로 파괴력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 미디어 산업 생태계는 그동안 워너브러더스 같은 영화 제작·배급사나 HBO 등 유료 방송 채널이 이용자가 보고 싶어 하는 콘텐츠를 만들면, AT&T 등 통신 업체와 컴캐스트 등 케이블TV 업체들이 가입자에게 이런 콘텐츠를 전달해 매월 수십달러씩 돈을 받는 형태다. 콘텐츠 제작사와 통신망(網) 업체 간 협업 관계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이런 오랜 협업 모델이 무너지고 있다. 예컨대 넷플릭스나 구글, 아마존 등 인터넷 기업들이 유료 동영상을 잔뜩 모아서, 인터넷으로 소비자에게 싼값에 마구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AT&T 같은 통신 업체로서는 자신들의 핵심 자산인 통신망의 가치가 점차 약해지고 있는 셈이다. 통신 업체가 수십 년간 통신망으로 번 돈으로 콘텐츠 제작 업체를 사버린 뒤, 이런 인터넷 기업들에 맞대응하며 새로운 질서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모바일의 미래는 비디오"… AT&T의 97조원짜리 빅뱅 선언


    AT&T는 타임워너를 인수한 직후에 낸 공식 자료에서 "비디오의 미래는 모바일이고, 모바일의 미래는 비디오(future of video is mobile and the future of mobile is video)"라고 인수 이유를 설명했다.


    AT&T는 이동통신 가입자 1억3100만명을 보유한 미국 2위 통신 업체다. 1위는 버라이즌(약 1억4200만명)이다. 이런 AT&T가 더 이상 '통화 요금'이 아닌 '영화, 드라마와 같은 비디오'가 통신 업체의 미래라고 선언한 것이다.


    타임워너는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와 24시간 보도 채널 CNN, 유료 케이블 영화 채널 HBO 등 보유한 미국 3위 미디어 그룹. 인수·합병이 완료되면 흥행 보증수표로 불리는 워너브러더스 제작 영화 '배트맨' 시리즈, '해리포터' 시리즈<사진>, HBO가 만든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 '밴드 오브 브러더스' 등이 AT&T로 넘어간다.


    AT&T는 우선 타임워너의 콘텐츠를 자사 휴대전화 가입자에게 독점 제공해 1위 버라이즌을 따라잡는 전략을 펼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유료 방송 시장의 위상 강화다. AT&T는 지난해 가입자 2000만명을 보유한 미국 최대 위성방송 업체 디렉TV를 485억달러(당시 49조7000억원)에 인수했다. 현재 자사 가입자를 포함해 유료 방송 가입자 2600만명을 확보하고 있다.


    통신 업체들은 AT&T의 행보에 잔뜩 긴장하고 있다. AT&T의 전략이 들어맞는다면 자신들에는 최대 위협이기 때문이다.

    미국 3위 이동통신 T모바일을 보유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25일 "미국 정부가 내 인수·합병 건은 거부하고 AT&T와 타임워너 건은 승인하겠느냐"며 "(만약 승인한다면) 이 나라의 정의는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손 회장은 2013년 미국 이동통신 시장 4위 스프린트를 220억달러에 인수했지만, 미국 당국은 반독점규제법 위반으로 인수·합병을 불허했었다.


    버라이즌은 인터넷 기업을 연이어 인수하면서 탈통신 노선을 걷고 있다. 버라이즌은 작년 아메리카온라인(AOL)과 야후의 포털 사업을 각각 44억달러와 48억달러에 인수했다. 콤플렉스 미디어, 어섬니스TV 등 신생 미디어 기업들에 투자하기도 했다.


    ◇진짜 전쟁터는 '통신 vs. 인터넷'


    전문가들은 AT&T의 최종 타깃은 넷플릭스 같은 인터넷 기업이라고 봤다. 넷플릭스는 AT&T의 통신망을 공짜로 활용해 휴대폰 이용자에게 '월정액 동영상'을 제공한다. 130여 국에서 유료 가입자 8100만명을 확보하고 있다. 10달러대 저렴한 가격은 50~100달러나 하는 미국 유료 방송 시장을 파괴할 정도로 강력했다. 넷플릭스는 '하우스 오브 카드' '마르코 폴로' 등 드라마를 독자 제작하면서 점차 세를 불리고 있다.


    1 월트디즈니의 밥 아이저 CEO/블룸버그. 2 컴캐스트의 브라이언 로버츠 회장 3 AT&T의 랜들 스티븐스 회장 4 넷플릭스의 리드 헤이스팅스 CEO


    구글은 세계 10억명 이상 이용자를 보유한 '유튜브'의 저력을 바탕으로, 올해 유료 서비스인 '유튜브 레드'를 강력하게 밀고 있다. 아마존도 이미 3년 전 '아마존 스튜디오'란 콘텐츠 제작사를 설립해 매년 10여 편의 드라마와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 작품들은 아마존이 운영하는 동영상 서비스 '아마존 프라임'에서 독점 제공된다. 인터넷발(發) 미디어 공략 3인방의 성장세는 거침이 없다.


    AT&T는 다음 달 월 35달러를 내면 100개 이상 채널을 무제한으로 스마트폰에서 볼 수 있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넷플릭스와 같은 온라인 동영상 시청 모델을 내놓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리드 헤이스팅스 최고경영자(CEO)는 이런 움직임이 자사에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란 견해를 보였다. 헤이스팅스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이 개최한 콘퍼런스에서 "미국 규제 당국이 넷플릭스와 HBO가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합병이 (반대할 만한)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정보기술(IT) 전문 매체 테크크런치는 "넷플릭스의 가장 큰 걱정은 망중립성(Net Neutrality)"이라고 보도했다.


    망중립성은 유·무선 통신망은 일종의 공공재(公共財)이므로 누구나 차별 없이 동등하게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예컨대 AT&T가 자사의 디렉TV 가입자들에게는 빠른 인터넷 속도를 보장해주면서 넷플릭스 서비스에는 나쁜 품질을 제공하는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통신 업체들은 그동안 구글과 같은 인터넷 기업이 '프리 라이딩(Free riding·이용료도 안 내면서 통신망을 활용해 돈을 번다는 뜻)'한다고 주장해왔다.


    ◇생존 걱정하는 전통 미디어 업체들


    전통적인 미디어 강자들은 생존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미디어 업계 최강자는 연간 매출이 745억달러에 달하는 미국 최대 케이블TV 업체인 컴캐스트와 524억달러인 애니메이션 제작사 월트디즈니다. 하지만 AT&T가 타임워너를 인수하면 연 매출이 1700억달러(약 194조원)에 달하게 되면서 단숨에 선두로 올라선다. 컴캐스트와 월트디즈니도 가만히 있을 수만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전통 강자들이 미디어 시장에 새롭게 등장한 신흥 통신 자본의 편에 설지, 아니면 인터넷 미디어 업체와 이해관계를 같이할지는 미지수다. 10년 전만 해도 미국 최대 케이블TV 업체인 컴캐스트의 경쟁자는 통신 업체였다. 하지만 이용자들이 비싼 케이블방송 가입을 속속 끊고, 넷플릭스 등으로 옮겨가는 '코드 커팅(code cutting)' 현상이 나타나면서 인터넷 미디어 기업에 대한 두려움도 팽배한 상황이다. 월트디즈니와 같은 콘텐츠 업체들로서는 넷플릭스나 구글이 전 세계를 하나의 서비스 권역으로 묶는 데 대한 불편함이 존재한다. 할리우드의 영화나 드라마 제작사들은 국가별로 판권을 팔면서 최대의 이득을 내는 전략을 써왔기 때문이다. 세계 유통을 한두 곳이 독과점하면 이들에 콘텐츠 판권을 제대로 받기 어렵다.


    국내 미디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세계 미디어 시장에서 갖는 엄청난 위상을 감안하면, 앞으로 AT&T·타임워너 합병 진영의 행보가 국내 미디어 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미국의 사례처럼 SK텔레콤, KT 등 엄청난 자본력을 갖춘 통신 업체가 케이블TV 업체나, 방송 제작사를 인수하며 시장을 흔들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