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연자실 공무원들 "우리가 만든 보고서가 최씨에게 갔다니..."

    입력 : 2016.10.27 10:10

    [최순실의 국정 농단]


    - 일손 내려놓은 관료 사회
    "나라 위해 일한다고 애썼는데 누굴 위해 일했단 말인가"
    "주요정책 결정에 최씨가 개입… 신뢰 상실해 추진 동력 잃어"
    장차관들 "동요하지 말라" 메시지 보내 다독거리기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 파문이 확산되면서 국정(國政) 운영의 손발 노릇을 하는 관료 사회도 크게 동요하고 있다. 각 부처 공무원들은 허탈감과 상실감을 호소하며 업무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중앙 부처 고위 관료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레임덕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 앞으로 정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지난 26일 밤 정부 세종청사의 각 부처 사무실에서는 공무원들이 일손을 놓은 채 삼삼오오 모여 '최순실 사태'를 다룬 방송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공무원들 "누구를 위해 일했나"


    중앙 부처 공무원들은 최순실 국정 농단이 하나둘 사실로 드러나자 충격에 빠져 있다. 대통령이 국가 행정 시스템이 아니라 비선(秘線)에 의지해 국정을 꾸려온 점에서 허탈감을 느끼고 있고, 직무에 충실한 공무원들이 비선 실세에 의해 부당하게 쫓겨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의 A과장은 "불철주야 일했는데 대통령은 우리보다 다른 사람을 믿었다는 것 아니겠냐"며 "비애감이 든다"고 했다. 경력 26년 차인 고위 공무원 B씨는 "과거에도 대통령의 아들 비리 등으로 실망을 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일개 사인(私人)이 청와대를 쥐락펴락했다는 점에서 충격의 강도가 다르다"고 했다.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26일 직원들이 점심식사를 하러 출입문을 나서고 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 보도가 잇달아 터져나온 이날 서울과 세종시 등 전국의 공무원들은 "누굴 위해 일하는 건지 모르겠다", "허망하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연합뉴스


    일부 관료는 국정교과서 집필, 개성공단 폐쇄 등 현 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 최씨를 비롯한 비선의 개입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며 불신을 표시하고 있다. 9년 차인 사회 부처 사무관은 "청와대에 보고서 한 장 올리려면 피땀 흘리면서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걸 따로 받아 보는 사람이 있었다니 넋이 나갈 지경"이라고 했다. 감사원 소속 30대 공무원은 "감사를 위해 전국 각지에 출장 가서 고생하는 입장에서 이번 사태는 기분 나쁘고 허탈하다"고 말했다. 세종청사에서는 젊은 공무원들이 복도나 옥상에 모여 "자괴감이 든다" "우리는 국민과 나라를 위해 일했는데 이게 뭐냐. 지금까지 누굴 위해 일했다는 말이냐"는 말들을 쏟아냈다.


    ◇산적한 정책 현안 추진 동력 상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산적한 정책 현안을 추진할 동력(動力)을 상실한 것 아니냐는 우려다. 당장 조선·철강 등 산업계 구조조정, 부동산 시장 안정 등 산더미 같은 경제 정책이 탄력을 받기 어려워진 것 아니냐는 회의론이 퍼지고 있다. 경제 부처 고위 공무원 C씨는 "최순실 사태가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면서 시급한 경제, 안보, 민생 이슈가 묻히게 되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의 앞날에는 대형 악재"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내년 예산안 및 세법 개정안, 규제프리존특별법, 서비스발전기본법 등이 국회 문턱을 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원래도 여소야대 정국이라 각 부처가 애를 먹었는데 앞으로 일하기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미르·K스포츠재단과 연관된 문화체육관광부의 경우 야당이 예산을 큰 폭으로 삭감하겠다고 공언해서 비상이 걸렸다. 문체부 관계자는 "대부분의 문화나 체육 예산이 최순실씨와 무관하다고 설득 중인데 한마디로 죽을 맛"이라고 했다.


    법인세율 조정과 같은 순수한 경제 이슈도 야당의 입김이 강해져 정부 입장을 관철하기 어려워졌다는 전망이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간부는 "정부의 방패막이가 되어야 할 여당이 힘을 잃어 정부가 야당을 설득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했다. 규제 개혁처럼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정책 과제는 이미 물 건너갔다는 한탄이 나오고 있다.


    ◇장차관들, 동요 확산 막기 안간힘


    뒤숭숭한 분위기가 확산되자 각 부처 장차관들이 부하 직원들을 다독거리며 동요 확산을 막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26일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은 "동요하지 말고 맡은 임무를 잘하라"고 당부했다. 이준원 농림축산식품부 차관도 비슷한 메시지를 국장들에게 보냈다. 이날 오후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경제 현안 점검 회의를 이튿날 오전에 열어 경제 부처 장관들과 현안을 논의하기로 했다고 서둘러 발표했다.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이럴 때일수록 공무원들이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눈치 보기와 복지부동이 심각해져서 풀린 나사를 조이기 쉽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수습을 위한 해결책으로 중립 내각 구성, 대통령 탈당 여부 등이 논의되면서 일손을 놓고 향후 정국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