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받고 '등급 장사' 하는 신용평가사 문 닫게 만든다

    입력 : 2016.09.22 09:41

    [금융위, 투자자 울리는 엉터리 신용평가 시스템 손보기로]


    투자자 불의의 피해 보는 일 없게 모기업 지원 가능성 평가서 배제
    기업이 평가사 선정하는 방식서 공적기관 통해 배정받는 제도, 내년 하반기부터 도입할 예정
    30년간 3개社 과점 지적에도 일단 제4의 신평사 도입은 유보


    #사례 1: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7월 29일 3조원대의 대규모 손실을 발표했다. 그런데 신평사들은 발표가 나기 불과 2주 전인 작년 7월 16일 대우조선해양에 'A-' 투자등급을 매겼다. 대우조선이 속으로 골병이 들어 있었는데 신평사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등급을 부여한 것이다. 대우조선해양이 스스로 부실이 있다는 점을 밝히고 나서야 신평사들은 부랴부랴 신용등급을 'A-'→'BBB'(7월 30일)→'BB+'(12월18일) 순으로 급히 낮췄다.


    #사례 2: 작년 3월 한국신용평가는 '저유가가 3대 주요 해운사의 수익성과 재무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목의 리포트를 발표했다. 한신평은 리포트에서 "유가 하락으로 유류비가 절감될 것으로 예상되고 올해 들어 해운사에 긍정적인 시장 환경이 마련되고 있다"면서 "2014년에 비해 '실제 영업이익'이 개선될 것"이라고 장밋빛 전망을 내놨다. 그렇지만 이 전망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해운사들의 상황은 저유가에도 지속적으로 나빠졌고, 그해 말에는 양대 선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합병설까지 불거졌다. 이 리포트가 나온 지 불과 1년여 만에 한진해운은 법정관리를 받게 됐다.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그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신용평가사와 회계법인들의 민낯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기업의 부실회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은 회계법인들은 투자자로부터 소송을 당하거나 고의성 여부에 대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 신평사들은 기업에 대한 평가를 엉터리로 해서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줬으면서도 이를 개선하기 위한 자구 노력은커녕 제대로 된 반성조차 없었다. 금융위원회가 21일 '신용평가시장 선진화 방안'을 내놓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신평사들의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해 신용등급의 정확성과 신용평가에 대한 시장의 신뢰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모기업 지원 배제하고 기업 신용등급 산정


    신평사들은 현재 기업들에 대해 신용평가를 할 때 모(母)회사의 지원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결정하고 있다. 투자자들의 경우 보수적인 투자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모회사의 지원 가능성을 제외하고 개별 기업의 독자적인 채무 상환 능력을 알아야 하는데 지금은 신용평가서에서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때문에 모회사가 지원을 중단했을 때 외부 지원을 고려한 신용등급을 믿고 투자한 투자자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발생했다. 금융위는 앞으로 '자체신용도'를 도입해 투자자들의 판단을 돕기로 했다. 자체신용도란 모기업이나 계열사의 지원을 받지 않고 한 기업이 독자적으로 채무를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제도는 지난 2012년과 2015년 도입이 추진됐지만 기업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내년부터 민간 금융사에 이 제도를 먼저 시행한 후 2018년부터 일반 기업에까지 단계적으로 확대 실시할 예정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자체신용도가 공개되면 투자자들이 기업에 대한 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신평사 '등급 장사' 하면 인가 취소


    신평사들이 정확하게 기업의 신용평가를 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이유는 신용평가에 대한 비용을 기업이 지불하기 때문이다. 박한 신용등급을 준다고 소문나면 기업들이 계약을 맺지 않기 때문에, 신평사들은 후하게 평가를 해주는 대신 기업과 계약을 체결하는 '등급 장사'를 해왔다. 금융위는 앞으로 신평사 간 등급을 담합하거나 계약 체결을 위해 신용등급을 이용한다고 파악되면 인가를 취소하는 제재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현재는 영업정지까지만 가능한데 처벌 수위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또 회사채 발행 기업이 신평사를 선정하는 시장구조를 바꾸기 위해 '신평사 선정 신청제'를 도입한다. 현재는 기업이 신평사 중에서 자신의 신용을 평가해 줄 신평사를 직접 선정해 '등급 쇼핑'을 한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앞으로는 기업이 금융감독원과 같은 제3의 공적기관에 신평사 선정을 대신 해달라고 신청하는 제도를 내년 하반기부터 도입할 예정이다. '제3자 의뢰 평가'도 도입해서 회사채를 사는 투자자가 신평사에 기업에 대한 평가를 의뢰할 수 있게 된다.


    ◇'제4의 신평사' 도입은 일단 유보


    기업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신용등급 결정의 배경에는 지난 30년간 이어져 온 3개 신평사의 과점체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제4의 신평사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위는 일단 제4의 신평사 도입은 보류하기로 했다. 신규 신평사가 허용되면 영업 경쟁이 심화돼 부실평가가 생겨나고 등급 인플레이션이 줄어들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번에 신용평가 제도 개선을 우선 실행한 뒤 그래도 상황이 변하지 않으면 제4 신평사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금융위는 ▲채권형 펀드에 대한 신용평가 도입 ▲신평사의 중요 정보 공시 확대 ▲금융투자협회를 통한 신평사 종합평가 실시 등도 도입하기로 했다. 김태현 금융위 자본시장국장은 "신평사들의 고질적인 문제를 고쳐 잘못된 신용등급 산정으로 인한 투자자들의 피해를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