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 급하다더니... '잠자는 예산' 13兆

    입력 : 2016.09.19 09:28

    하반기 경기 불씨 살리겠다며 11兆 추경 편성하고 보니 상반기 쓰지도 못한 예산 13兆
    각 부처 "일단 챙겨놓고 보자"… 유사·막연한 사업 편성 악습


    - 소가 웃을 예산… 月貰 지원 대상에 보육원 아기도 포함
    보육원 아동 1만4000여명 '1 가구'로 분류해 주거급여 책정
    해외 인수·합병 지원 1조2000억, 지금까지 한푼도 집행하지 않아
    작년 편성만하고 안쓴 신규사업, 14개 부처에서 1조5000억 달해


    올해 편성해놓은 예산 가운데 올 상반기에만 13조원 넘는 예산이 집행되지 않은 것으로 집계됐다. 기획재정부가 경기의 불씨를 살리겠다고 올 하반기에 11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하고, 추경 통과를 놓고 여야가 한 달 넘게 정치적 공방까지 벌이다 어렵게 통과시켰는데 정작 이보다 더 많은 규모의 본예산은 전국 곳곳에서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채 잠자고 있는 것이다.


    18일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올 들어 상반기(1~6월) 중앙정부가 집행한 본예산 215조원 중 주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 등에 내려 보낸 예산은 140조5000억원이었다. 이 돈 가운데 실제로 쓰인 예산은 127조4000억원이었다. 43개 부처, 지방자치단체, 공공 기관 등의 계좌에서 묵히고 있는 돈이 상반기에 배정된 예산의 9.3%에 달하는 13조1000억원이었다.


    전문가들은 공사 지연 등으로 불가피하게 불용액(不用額)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보통 불용 예산 규모는 전체 예산의 2~3%가 적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3조1000억원의 미(未)집행 예산엔 중앙정부가 지방자치단체 등에 내려 보냈지만 아직 사업 현장에까지 자금이 미치지 못한 경우와 애초에 예산을 과하게 받아가 연말까지 돈을 써도 예산이 남는 경우가 모두 포함된다. 전자의 경우 조용만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국장은 "지자체가 예산을 집행하는 데까지 시차가 있는 점을 감안하면 하반기엔 미집행률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며 "지자체를 독려하고 취지에 맞는 한도 내에서 예산의 전용을 허용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경기 살리기를 위해 빠르게 집행되어야 할 예산이 늦어지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경우는 각 부처에서 유명무실한 예산까지 습관적으로 챙겨가 적지 않은 예산이 집행되지 않는 것이다. 가령 국토교통부가 각 지자체를 통해 저소득층에 주거비를 보조하는 주거 급여 예산이 대표적이다. 국토부는 이 주거 급여 예산을 상정할 때 생후 36개월도 안 된 보육원 영아까지 '1가구'로 분류했다.



    "갓난아기한테까지 월세 지원금을 배정할 필요가 있나요? 정작 필요한 보육 교사 지원 예산은 부족한데, 엉터리 예산만 책정되는 걸 보니 분통 터지네요."


    18일 서울 강북 A보육원에서 만난 김모 원장은 정부의 방만한 주거 급여 정책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주거 급여는 저소득층의 월·전세 등 주거비를 지원하는 제도다. 그런데 부모의 학대나 이혼, 가출 등을 피해 A보육원에 맡겨진 72명의 아동 전원이 '주거 급여 대상 가구'에 포함됐다. 이 중엔 만 3세 미만의 영아 16명을 포함해 영·유아가 절반가량 된다. 혼자 월세방 얻어 살 나이도 못 되는 데다 시설의 보호를 받고 있어 주거 급여가 필요 없는데도 72명의 아이가 '주거 급여 대상 72가구'로 분류된 것이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주거 급여를 평균 9만원에서 11만원으로 올리고, 수혜 대상도 중위 소득(중간 순위 소득) 33% 이하에서 43% 이하로 늘렸다. 97만가구에 1조1073억원의 예산이 편성됐다. 실제로는 80만가구에 7533억원만 지급돼 예산 집행률은 68%에 그쳤다. 주거 급여 대상에 복지 시설 거주자나 병원 장기 입원자 등 17만여가구까지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전국 보육 시설 280여곳 아동 1만4000여명도 '1가구'로 분류해 주거 급여 예산만 확보하고 집행은 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불용(不用) 처리된 예산이 2539억원에 달했다. 그런데도 올해도 작년과 비슷하게 1조원 넘는 예산(1조289억원)이 배정된 상태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주거 급여 대상자 수가 수시로 바뀔 수 있어 넉넉히 예산을 책정했다"고 해명했다.


    내년에 정부가 400조원이 넘는 수퍼 예산을 짰고, 올해 11조원 추가경정예산도 국회를 통과했지만 정작 예산의 실제 집행은 각 부처,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도진 한국조세재정연구원 국가회계재정통계센터장은 "피가 모세혈관까지 흘러야 신체 각 부위가 온전히 동작할 수 있듯 예산도 각 말단까지 잘 흘러가 집행돼야 한다"며 "정부 지출은 경제성장률을 구성하는 항목 중 하나인데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만큼 성장이 지체되는 셈이다"고 말했다.


    ◇습관적 예산 편성·유사 사업


    문화재청과 문화체육관광부는 국악 상설 공연, 궁중 문화 축전 등 비슷한 고궁 관광 사업에 올해 각각 78억원, 48억원씩을 예산으로 배정했다. 예산정책처는 "사업 내용상 유사·중복 측면이 있어 비효율이 발생할 우려가 있으므로 조정하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두 부처는 "세부 내용에선 각자의 사업이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예산을 각각 챙겼다. 문화재청은 올 상반기에 예산을 제대로 집행 안 한 비율이 가장 높은 부처 1위로 꼽혔고, 문화체육관광부는 그 뒤를 이어 4위에 올라 있다.


    통일부는 9년째 예산 집행액이 '0원'인 남북 하천 정비 사업에 예산을 편성해오고 있다. 2013년 32억원이던 예산을 2014년부터는 63억원으로 배 가까이 증액했다. 2007~2015년간 책정된 344억원이 고스란히 불용 예산으로 남았다. 기획재정부는 작년 9월 국내 기업의 해외 인수·합병(M&A)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외국환평형기금에서 1조2000억원을 배정했으나 현재까지 집행 실적이 전무하다. 이처럼 집행 실적이 '0%'인 신규 재정 사업은 작년 44개(14개 부처)로 그 규모는 1조5000억원에 달했다.


    올 상반기에 예산을 집행 안 한 규모가 가장 큰 부처는 국토교통부로 2조원이 넘었고, 산업통상자원부(1조9600억원)·환경부(1조6400억원) 등이 뒤를 이었다. 43개 부처의 평균 예산 미집행 규모는 3043억원이었다.


    ◇예산 짤 때부터 불용 예산 줄여야


    기획재정부는 작년과 올해 중복·과잉 사업 689개를 통폐합했고, 내년 예산안에서도 205개 사업을 감축하기로 했다. 그러나 재정의 효율성을 갉아먹는 '구멍'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올해 추경 11조원도 상당 부분 불용될 가능성이 높다. 중앙정부가 추석 이전에 3조7000억원을 지자체와 시·도교육청에 교부했지만 막상 현장에서 집행이 지체되면 불용 예산이 될 수 있다. 작년에도 정부가 경기를 살리겠다며 11조6000억원의 추경을 편성했지만, 추경 관련 사업들이 지지부진하며 추경의 48%(5조530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국고에 도로 넣었다. 예산정책처가 지적했듯 "4건 중 1건이 계획이나 준비가 부실했기 때문"이었다.


    박기백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예산을 완벽하게 짜긴 어렵겠지만 불용액이 최대한 적게 나오도록 하는 게 이상적인 재정 운용"이라고 말했다. 박명재 새누리당 의원은 "실제 집행이 어려운 사업에 과도하게 보조금 등을 주면 정부 부채만 커지는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며 "주민 반대 등 사업 지연 요인들을 관리하고 지자체의 사업 집행 능력을 좀 더 엄격하게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