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만에 고친 '기업 지배구조 원칙'... 후진적 관행 바꿀까

    입력 : 2016.09.12 09:26

    [기업지배구조원, 모범규준 개정]


    ① 국제 표준 맞춰 기준 강화
    법 위반 임원 선임 배제 등 책임감 부여 항목 새로 담아


    ② 못 지켰을 땐 '이유' 공시
    이사회 운영·평가 등 10개 항목… 거래소, 자체 평가 보고하게


    ③ 기관투자자들 개입해야
    경영 감시하는 '스튜어드십' 논의, 올해 안 행동강령 발표 계획
    재계 "한국 특성 반영해야" 반발


    '한국 기업의 경영 관행, 조사 대상 61개국 중 61위'.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내놓은 2016년 국가 경쟁력 평가 중 한 부분이다.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한 평가도 낙제점이다. 아시아 11개국을 대상으로 지배구조 순위를 발표하는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는 한국을 최하위권인 8위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는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의 원인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후진적인 지배구조 탓에 한국 기업과 제품이 제값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 당국의 직간접적인 개입 아래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기업 지배구조 모범규준(이하 모범규준)'을 강화하고, 모범규준을 따르지 않을 경우 그 이유를 공시(公示)하게 하고, 연기금 등 기관 투자자들이 지배구조 개선에 나서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기업 지배구조 개선 3종 세트'다. 기업들은 반발하고 있다. '기업 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①기업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따르라


    모범규준은 1999년 처음 만들어졌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재벌의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 후 2003년 한 차례 개정된 뒤 13년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 지난해 G20(주요 20개국)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기업지배구조 원칙을 개정하면서 국제 표준에 맞춘 개정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지난달 다시 개정됐다.


    모범규준은 법률이 아니라 자율적인 규약이다. 모범규준을 만든 주체도 한국거래소와 금융투자협회 등 자본시장 유관 기관이 설립한 사단법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다. 그런 모범규준에 대해 재계가 반발하고 있다. 왜 반발할까. 바뀐 모범규준은 최고경영자 승계 정책을 마련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사회가 최고경영자 승계를 담당하는 조직을 만들고, 최고 경영자 후보군을 사전에 교육할 수 있는 제도를 구비하라는 내용이다. 최고경영자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경우를 대비해 이른바 '오너 리스크'를 줄이는 장치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선 후계 구도를 자승자박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창업주와 2세, 3세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기업 지배구조는 주로 전문경영인으로 승계되는 서구와는 상황이 다르다"며 "회장님 의중을 어떻게 알고 승계 플랜을 공식화하느냐"고 말했다.


    모범규준은 '기업 가치를 훼손하거나 주주 권익의 침해에 책임이 있는 자를 임원으로 선임하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는 항목도 새로 넣었다. ▲행정적·사법적 제재를 받았거나 그 집행을 면제받은 경우 ▲회사의 재무 상태 등 주요 정보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감춘 경우 ▲과도한 겸임으로 이사로서 충실한 의무 수행이 어려운 경우 등을 임원 선임 불가(不可) 조건으로 예시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기업 총수들이 사법 처리를 받았거나 사면(赦免)을 받은 대기업 입장에선 부담일 수밖에 없다.


    모범규준은 ▲기업의 근로 조건은 최소한 국제노동기준을 상회해야 한다 ▲주주총회의 일시·장소·의안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충분한 기간 전에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조명현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원장(고려대 경영대 교수)은 "국내 기업 환경, 국제 자본시장의 변화를 반영해 상장 기업에 좀 더 책임감을 부여하는 내용을 모범규준에 새로 담았다"고 말했다.


    ②따르지 못한다면 이유를 공시하라


    그러나 모범규준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모범규준을 만든 주체도 사단법인일 뿐이다. 1999년 처음 만들어진 모범규준에 대해 그간 기업들이 반대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던 이유도 구속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은 다르다. 한국거래소가 모범규준 중 10개 항목을 추려,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이 이 10개 항목을 따랐는지 여부를 적은 '지배구조 현황 보고서'를 작성하게 할 방침이다. 만약 모범규준을 지키지 못했다면 지키지 못한 이유를 보고서에 적어야 한다. 이른바 '원칙준수 예외설명(Comply or Explain)' 방식이다. 기업들의 보고서는 거래소 전자공시시스템(KIND)을 통해 일반에 공시(公示)될 계획이다. 거래소와 금융당국은 주주 권리, 주주의 공평한 대우, 이사회 기능, 이사회 구성 및 이사 선임, 사외이사, 이사회 운영, 이사회 내 위원회, 평가 및 보상, 내부감사기구, 외부감사인 등 지배구조 관련 10개 항목에 대한 보고서 양식을 만들어 조만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들은 10개 항목 각각에 '○(잘함), △(보통), ×(미흡)' 등으로 자체 평가를 내리고, 그렇게 평가한 이유를 자율적으로 작성해야 한다.


    물론 기업이 이 보고서를 내지 않아도 제재할 방법은 없다. 예를 들어 10개 항목 중 3개 항목만 지켜 보고서를 내고, 나머지 7개 항목은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처벌 규정은 없다. 그러나 재계 관계자는 "공시 시스템이 도입된 후에 지배구조 보고서를 내지 않으면 시장에서 '이상한 기업'으로 취급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시 제도가 기업에는 '네임 앤드 셰임(name and shame· 거론해서 망신 주기)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재계의 우려다.


    ③기관투자자들이 개입하라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들을 채찍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라고 불리는 일종의 자율적인 행동강령을 만들어 놓고, 기관투자자들이 이 행동강령을 따르겠다고 천명하는 방식이다. 이 강령에는 기관투자자가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내용을 담는다. 서양에서 큰 저택이나 집안일을 도맡는 집사(스튜어드)처럼, 기관투자자도 고객 자산을 선량하게 관리할 의무가 있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스튜어드십 개념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수익률에만 관심 있던 기관투자자가 좀 더 적극적으로 경영 감시에 나서 투자 수익을 높이는 한편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취지다. 우리나라에선 2014년부터 도입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돼 금융당국과 유관기관 등이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초안(草案)을 마련한 상태다. 기관투자자들이 투자한 회사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투자자에게 의결권 행사 활동을 정기적으로 보고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스튜어드십 코드 또한 모범규준과 마찬가지로 지배구조원이 중심이 돼 올해 안에 행동강령을 발표하겠다는 목표다. 그러나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다. 기관투자자의 맏형 격인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고, 재계의 반발도 거세기 때문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관투자자들이 경영에 간섭하게 되면 배당률을 높여 돈을 더 챙기는 등의 행태를 보이기 쉽고, 장기적인 기업 발전은 도외시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